**(3) 중국한시교실/ ---絶句(5언절구)

(235) 八陣圖(팔진도)팔진도 - 두보(杜甫) : 5언 절구

착한 인생 2019. 12. 2. 11:44

(235) 八陣圖(팔진도)팔진도 - 두보(杜甫 : 5언 절구

  

     

功蓋三分國[공개삼분국] 功業은 세 나라의 으뜸이었고

名成八陣圖[명성팔진도] 名聲은 팔진도에서 이루어졌네.

江流石不轉[강류석불전]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건만

遺恨失吞吳[유한실탄오] 나라 삼키려 했던 잘못, 으로 남아있네.

 

[註釋]

.八陣圖[팔진도] 여덟가지로 을 운용하는 방법이다.‘八鎭·······등 여덟 가지 陣勢이고, 五行相生相剋을 상정한 훈련 진법이라 한다. ‘는 법도 또는 규모이다. 諸葛亮이 만든 팔진은 모두 네 곳에 있는데, 여기서는 夔州의 팔진도를 가리킨다. 遺跡嗜酒 서남쪽 영안성 앞 모래섬 위에 있다. 작은 돌을 모아 언덕을 만들었는데8 ×8 =64개의 돌무더기로 각각의 높이가 5척이며 縱橫으로 배치되어 있다. 물이 불어나면 보이지 않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드러난다.

 

功蓋三分國[공개삼분국] 功蓋는 제갈량이 세상을 덮을 만한 功業을 이루었음을 말한다. ‘三分國··세 나라가 鼎立한 것을 말한다. 3절은 三國鼎立의 과정에서 제갈량의 공이 으뜸이었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石不轉[석불전] 제갈량이 돌을 펼쳐놓아 만든 팔진도는 , 강물이 조석으로 부딪쳐도 오히려 依然한 것이 옛날과 같음을 말한다. 劉禹錫嘉話錄夔州西市는 강가의 모래톱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아래 제갈량의 팔진도가 있다. 돌을 모아 배치한 것이 완연하게 그대로 남아 있는데 골짜기에 물이 크게 불어나고 三蜀이 눈이 녹는 때가 되면, 물이 콸콸 흘러내려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와 백 길이나 되는 마른 나뭇가지가 물살을 따라 떠내려 온다. 물이 빠지고 강이 잔잔해지면 만물이 모두 옛 모습을 잃은 채 드러나는데, 제갈량의 작은 돌무더기는 표시하고 모아놓은 순서가 그대로이다. 이와같은 것이 근 600년이고 오늘날까지 움직이지 않는다.[夔州西市 俯臨江沙 下有諸葛亮八陣圖 聚石分布 宛然猶存 峽水大時 三蜀雪消之際 澒涌滉漾 大木十圍 枯榚百丈 隨波而下 及平水落川平 萬物皆失故態 諸葛小石之堆 標聚行列依然 如是者 近六百年迨今不動(기주서시 부림강사 하유제갈량팔진도 취석분포 완연유존 협수대시 삼촉설소지제 홍용황양 대목십위 고요백장 수파이하 급평수락천평 만물개실고태 제갈소석지퇴 표취행렬의연 여시자 근육백년태금불동) ]”라고 하였다.

 

遺恨失吞吳[유한실탄오] 이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한데, 대체로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를 침공함으로써, 와 연합하여 에 대항하려 했던 제갈량의 계책이 무너져 이 되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通譯]

    諸葛亮··吳 三國鼎立시켜 그 공이 천하의 으뜸이었다. 그는 유명한 팔진도를 만들어 魏吳에 대항하였다. 강들은 밤낮으로 흐르는데 팔진도의 돌무더기만은 그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다. 그러나 오나라를 倂呑하려 했던 유비의 실수가 제갈량에게는 으로 남아있다.


[解題 作法分析]

    이 작품은 杜甫大曆 元年(766) 夔州에 있을 때 八陣圖의 유적을 보고 지은 詠史詩이다. 題目八陣圖라 함은 실로 제갈량의 공업을 평가하고, 蜀漢의 흥망에 대한 感慨를 서술하고자 함에 있다. 제갈량이 유비를 도왔으므로 三國鼎立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그의 군사를 다스리는 經律森嚴했으며, 謀略은 뛰어났다. 그러므로 八陣圖防禦 陣線이 있어 비록 강물은 쉬지 않고 흘러 시대는 옮겨가고 세력은 바뀌어도 그의 英名은 길이길이 후세에 드리워지리라. 다만 하나 遺憾나라를 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20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는 도리어 한 의 공정한 史論이다.

첫 두 는 제갈량의 공적과 명성을 묘사하였고, 3는 그 遺跡神異함을 그렸으며, 4는 자기의 심사를 말하였다. ‘遺恨呑吳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한데, ‘유비가 를 삼키려던 계획을 제갈량이 막지 못했음을 후회한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돌은 구르지 않는다.’는 것은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다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제갈량의 兵法이 신묘하다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遺恨를 치려했던 失策이 결국은 의 쇠락을 가져오고 멸망을 앞당기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데 있다. 유적 앞에서 두보는 제갈량의 공업이 성취되지 못한 것을 깇을 깊이 안타까워하고, 또한 유비에 대해서는 완곡한 비평의 뜻을 붙인 것이다.

 

[韻律]

    이 시는 제3전가 하삼측(하삼련)을 썼으나 하지 않았다. 全詩에 맞아 律絶이다.

 

1.律絶(율절) : 平仄平起格 혹은 仄起格定式하는 絶句인데 또한 今絶이라 칭한다.

 

[全唐詩]

229_67 八陣圖杜甫

功蓋三分國名高八陣圖江流石不轉遺恨失吞吳

 

  

 

八陣圖

 

 

三國을 덮고

이름은

八陣圖로 이루었다.

 

강물은 흘러도

그 돌은 구르지 않으리.

 

다만 遺恨

나라 삼키지 못함이라.


 

[平仄]

功蓋三分國(공개삼분국) ○●○○●(平去平平入, a<仄頭·仄脚>)

                       功gōng gài sān fēn guó,

名成八陣圖(명성팔진도) ○○●●◎(平平入去平, B<平頭·平脚>)

                       名míng chéng bā zhèn tú。

江流石不轉(강류석불전) ○○●●●(平平入入上, b<平頭·仄脚>)

                       jiāng liú shí bù zhuǎn

遺恨失吞吳(유한실탄오) ○●●○◎(平去入平平, A<仄頭·平脚>)

                       hèn shī tūn wú

 

이 시는 측기식인 <. 仄起格平聲韻定式

仄平平仄, 平平仄平, 平平仄仄, 仄仄平平 (首句을 쓰면 응당 仄仄仄平平이 되어야 한다.) >이다.

 

[直譯 文章構造]

(:주어)

(:술어)

(:)

(:)

(:목적어)

공 공

덮을 개

석 삼

나눌 분

나라 국

功蓋三分國(공개삼분국) 은 세 개로 나누어진 나라를 덮었고

(:주어)

(:술어)

(:)

(:)

(:보어)

이름 명

이룰 성

여덟 팔

진 징

그림 도

名成八陣圖(명성팔진도) 이름은 八陣圖로 이루었네.

(:주어)

(:술어)

(:주어)

(:)

(:술어)

강 강

흐를 류

돌 석

아니 불

구를 전

江流石不轉(강류석불전) 강물은 흐르되, 돌은 구르지 않으니

(:)

(:술어)

(:목적술어)

(:목적술어)

(:목적어)

도리어 유

한스러울 한

잃을 실

실기할 실

삼킬 탄

오나라 오

④ 遺恨失吞吳(유한실탄오) 오히려 나라를 삼키는 것을 잃었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네.

 

功蓋三分國(공개삼분국) 三國을 덮고

名成八陣圖(명성팔진도) 이름은 팔진도로 이루었다.

江流石不轉(강류석불전) 강물은 흘러도 그 돌은 구르지 않으리

遺恨失吞吳(유한실탄오) 다만 遺恨 오나라 삼키지 못함이라.

 

 

[集評]

嘗夢子美謂僕 世人多誤會八陣圖詩 以爲先主武侯欲與關公報仇 恨不能滅吳 非也 吾意本謂吳蜀脣齒之國 不當相圖 晉之能取蜀者 以蜀有呑吳之志 以此爲恨耳 [상몽자미위복 세인다오회팔진도시 이위선주무후욕여관공보구 한불능멸오 비야 오의본위오촉순치지국 부당상도 진지능취촉자 이촉유탄오지지 이차위한이 - 송 소식 동파지림] - 宋 蘇軾 東坡之林

 

일찍이 꿈에서 자미(두보)가 나에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八陣圖>시를 오해하여 , 先主武侯關羽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오나라를 멸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고 말하는데 그건 아니다. 나의 뜻은 본래 ·는 순치의 관계에 있는 나라이므로 마땅히 서로 범해서는 안 되니, 할 수 있었던 것은 를 삼킬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스러워할 뿐이다.’라는 의미이다.”

할 수 있었던 것은 를 삼킬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의미의 해석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일으킨 이릉전투로 인하여 촉의 국력손실은 물론 나라도 을 믿지 못하고 언제든지 를 침략할 것이라는 생각을 품어왔었다. 비록 제갈량의 蜀吳同盟(촉오 중 어느 한 나라가 위에게 공격당할 시 공격당하지 않은 나라는 위를 공격한다) 정책이 제갈량 생전에는 효력을 미쳤지만, 제갈량 사후에는 그 동맹을 이 지킬지 미지수인 로서는 (당시까지는 이 아니었음)을 공격했을 시 蜀吳同盟의 협약대로 를 공격해서 의 위기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위가 촉을 취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관우가 비록 죽었지만, 미수의 복수전인 이릉전투를 벌이지 않았더라면 국력손실 방지와 견고한 촉오동맹으로 촉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유추할 수 있다.

 

遂使諸葛精神 炳然千古 讀之殷殷有金石聲 - 淸 愛新覺羅 弘歷 唐宋詩醇

수사제갈정신 병연천고 독지은은유금석성 - 청 애신각라 홍력 당송시순

 

드디어 제갈량의 정신이 천고에 환히 빛나게 되었으니, 이것을 읽고 있으면 殷殷하게 金石의 소리가 난다.

 

按先主征吳敗積 還至魚腹 孔明嘆曰 法孝直若在 必能制主上東行 不至危傾矣 公詩意亦如此淸 錢謙益 杜工部集箋

안선주정오패적 환지어복 공명탄왈 법효직약재 필능제주상동행 부지위경의 공시의역여차 청 전겸익 두공부집전

 

살펴보면 先主를 치다가 실패하고 魚腹으로 돌아왔을 때 孔明歎息하며 말하기를 法孝直(法正)이 만일 있었다면 반드시 主上이 동쪽으로 가는 것을 능히 제압하여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였으니 , (杜甫)가 가진 뜻도 이와 같다.

 

江流石不轉 此陣圖之乘名千載者 所恨呑吳失計 以致三分功業 中遭跌挫耳 淸 仇兆鰲 杜詩詳注

강류석불전 차진도지승명천재자 소한탄오실계 이치삼분공업 중조질좌이 청 구조오 두시상주

江流石不轉은 이 八陣圖가 천 년 동안 그 이름을 남기게 됐다는 것이다. 한스러운 일은 를 삼키려 했던 실책 때문에 천하를 삼분하는 공업이 중도에 좌절되도록 만든 것이다.

 

說是詩者 言人人殊 大率皆以呑吳失計之恨 與武侯失於諫止之恨 坐殺武侯心上著解 抛却石不轉三字 以致全詩走作 豈知遺恨從石不生出耶 蓋陣圖正當控扼東吳之口 故借石以寄其惋惜 云此石不爲江水所轉 天若欲爲千載留遺此恨跡耳 如此線是詠陣圖之詩 皮紛紛推測者 皆不免脫 -淸 浦起龍 讀杜心解

설시시자 언인인수 대솔개이탄오실계지한 여무후실어간지지한 좌살무후심상저해 포각석불전삼자 이치전시주작 기지유한종석불생출야 개진도정당공액동오지구 고차석이기기완석 운차석불위강수소전 천약욕위천재류유차한적이 여차선시영진도지시 피분분추측자 개불면탈모 -청 포기룡 독두심해

 

를 설명하는 데는 그 말이 사람마다 다르다. 대개는 모두 를 삼키려 했던 실책에 대한 , 를 치는 것을 武侯가 중지하도록 하지 못한 잘못에 대한 , 이 두 가지 으로 무후의 마음이 좌절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는 石不轉세 글자를 버려두어서 전체 시를 왜곡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遺恨石不轉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어찌 알겠는가? 대개 陣圖東吳를 막는 入口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돌을 빌려 그 애석해하는 뜻을 붙인 것이다. 이 돌이 흐르는 강물에도 구르지 않는 다는 표현에는 하늘이 이 한스러운 유적을 천 년 동안 남겨놓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 시가 다만 진도만을 노래한 시라고 한다면, 저 분분하게 추측하는 자들은 모두 본지에서 벗어남을 면치 못할 것이다.

 

詩意謂吳蜀脣齒之國 本不應相圖 乃孔明不能諫止征吳之擧致秭歸挫辱 爲生平遺恨 亦以先主崩於夔州 故感及之 - 淸 楊倫 杜詩鏡銓

시의위오촉순치지국 본불응상도 내공명불능간지정오지거치자귀좌욕 위생평유한 역이선주붕어기주 고감급지 - 청 양륜 두시경전

 

이 시의 뜻은 脣齒關係에 있는 나라들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응당 서로 범해서는 안되는데, 이에 孔明를 정벌하는 일을 중지하도록 하지 못하여 秭歸(자귀)에서 모욕을 당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평생의 遺恨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先主夔州에서 崩御했기 때문에 감개가 거기까지 이른 것이다.

 

吳蜀脣齒 不應相仇 失呑吳 失策于呑吳 非謂恨未曾呑吳也 隆中初見時 已云東連孫權 北拒曹操矣- 淸 沈德潛 唐詩別裁集19

오촉순치 불응상구 실탄실책우탄오 비위한미증탄오야 융중초견시 이운동연손권 북거조조의- 청 심덕잠 당시별재집19

 

·脣齒의 관계이므로, 응당 원수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失呑吳를 삼키는데 있어서 失敗한 것이지, 일찍이 를 삼키지 못한 것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제갈량이 隆中에서 처음 유비를 보았을 때 이미 으로는 손권과 연합하고, 으로는 曹操를 막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失呑吳 東坡謂失在呑吳之擧 此確解也 前題武侯廟 故寫出武侯全部精神 此題八陣圖 故只就陣圖一節 寫其遺恨 作詩切題之法 有如是 - 淸 李錢 詩法易簡錄

실탄오 동파위실재탄오지거 차확해야 전제무후묘 고사출무후전부정신 차제팔진도 고지취진도일절 사기유한 작시절제지법 유여시 - 청 이전 시법역간록

 

失呑吳에 대해 東坡(蘇軾)가 이르기를 잘못은 를 삼키려는 擧事에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정확한 해석이다. 앞에서는 무후묘에 했기 때문에 무후의 전체적인 정신을 그려 내었고, 이것은 八陣圖에 대한 이기 때문에 다만 八陣圖 한 가지에 대해 그 을 그린 것이다. 시를 지을 때 제목과 딱 들어맞게 하는 법으로 이와 같은 것이 있다.

 

此當是大曆元年初 至夔州時作-淸 朱鶴齡 杜詩箋注

차당시대력원년초 지기주시작-주학령 두시전주

 

이 시는 마땅히 大曆元年(766)初 夔州에 이르렀을 때 지은 것이다.

 

失呑吳猶言未能呑吳耳 以武侯如此陣圖而不能呑吳 眞千古遺恨 故情誠所寄 石不爲轉 大意如出師未捷二句同一感慨 後人橫亘一吳蜀脣齒相依之見 遂致自尋苦惱 好事者且僞託子瞻之說 竝託於夢 兼誣杜公 亦可笑也 東坡題跋 及東坡全集 皆有記子美八陣圖詩 收者失於識別耳 - 現代 高步瀛 唐宋詩擧要

실탄오유언미능탄오이 이무후여차진도이불능탄오 진천고유한 고정성소기 석불위전 대의여출사미첩이구동일감개 후인횡긍일오촉순치상의지견 수치자심고뇌 호사자차위탁자첨지설 병탁어몽 겸무두공 역가소야 동파제발 급동파전집 개유기자미팔진도시 수자실어식별이 - 현대 고보영 당송시거요

 

失呑吳를 삼키지 못하였다고 한 것과 같으니, 武侯가 이런 八陣圖를 만들었음에도 를 삼키지 못한 것은 실로 천고의 유한이다. 그러므로 그가 들인 정성으로 인해 돌이 구르지 않는 것이니, 대체적인 뜻은 出師未捷(丞相)’ 와 그 감개에 있어 동일하다. 후인들은 蜀吳脣齒처럼 서로 의지하는 관계였다는 견해에 걸려서 드디어 스스로 찾아서 고뇌하는 데 이르렀고, 호사가들 또한 子瞻(蘇軾)의 설에 가탁하여 꿈을 핑계대면서 杜公(두보)까지 속이려 들었으니 역시 가소롭다. 東坡의 제발 및 東坡全集에 모두 子美<八陣圖>가 기재되어있는데, 수록한 자가 識別함에 있어 실수한 것일 뿐이다.

 

首句極讚武侯 次句入題 三句就八陣圖說 江流句 縱句面看似寫聚石不爲水所衝激 實已含末句恨字之意 末句說者聚訟 大槪不出兩意 一則恨未呑吳 一則恨失於呑吳 沈德潛唐詩別裁云云 沈乃主後一說者 皆鼎足之勢 在劉備不忍一時之忿 伐吳兵敗 致蜀失吳援而破裂 遂使晉能各個擊破 由此言之 沈說是也 石不轉有恨不消之意 知此五字亦非空設 杜甫運思之細 命意之高 於此可見 - 現代 劉永濟 唐人絶句精華

수구극찬무후 차구입제 삼구취팔진도설 강류구 종구면간사사취석불위수소충격 실이함말구한자지의 말구설자취송 대개불출양의 일칙한미탄오 일칙한실어탄오 심덕잠당시별재운운 심내주후일설자 개정족지세 재유비불인일시지분 벌오병패 치촉실오원이파열 수사진능각개격파 유차언지 심설시야 석불전유한불소지의 지차오자역비공설 두보운사지세 명의지고 어차가견 - 현대 유영제 당인절구정화

 

武侯를 극찬하였고, 2는 제목을 내용에 담았으며, 3구는 八陣圖에 대해 말하였다. ‘江流石不轉은 표면상으로는 모아놓은 돌이 강물에 충격을 받지 않음을 표시한 듯하지만, 실은 마지막 의 뜻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마지막 는 설명하는데 있어 異論紛紛한데, 大槪는 다음의 두 가지 뜻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하나는 를 삼키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를 삼키려는 데 잘못이 있었음을 한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沈德潛唐詩別裁集에서 이것을 말했는데, 그는 後者의 설을 주장하였다. 대개 鼎足의 형세에서 劉備가 한때의 분함을 참지 못함으로 인해 를 치려다가 패배하여, 에게 도움 받을 기회를 잃고 파멸하는 상황을 초래하였고, 드디어 으로 하여금 各個擊破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심덕잠의 말이 옳다. ‘江流石不轉에는 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으니, 이 다섯 글자가 또한 근거 없이 가설한 말이 아님을 알겠다. 杜甫가 그 생각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섬세한 것과 주제를 정하는 데 있어서 수준이 높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武侯之志 在嚴漢賊之辨 遂先主之知 征吳悲所急也 乃北伐未成 以先主猇停挫敗 强鄰未滅 勝有陣圖遺石 動悲壯之江聲 故少陵低回江浦 感遺恨於呑吳 千載下如聞歎息呑吳也 - 現代 兪陛雲詩境淺說

무후지지 재엄한적지변 수선주지지 정오비소급야 내북벌미성 이선주효정좌패 강린미멸 승유진도유석 동비장지강성 고소릉저회강포 감유한어탄오 천재하여문탄식탄오야 - 현대 유폐운시경천설

 

武侯의 뜻은 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先主知遇에 보답하는 데에 있었으니, 를 치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北伐은 성공하지 못한 채 先主猇停(효정)에서 패배하였고, 강한 이웃(東吳)은 멸망하지 않았는데, 八陣圖의 남은 돌이 그대로 있으니, 悲壯한 강물소리에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므로 少陵(杜甫)은 강가를 배회하면서 를 삼키는 것에 대한 遺恨을 느낀 것이다. 천 년 후애도 그의 탄식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참고자료]

李穡은 그의 시 <卽事>(牧隱詩藁24)에서 두보의 이 시 제1를 변용하여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老年情興謝經營 剩得幽居事事淸 風靜山梨時自落 秋深庭蘚爲誰生 道存五就知伊尹 功蓋三分憶孔明 默坐悠然對黃卷 古今天下幾昇平

노년정흥사경영 잉득유거사사청 풍정산리시자낙 추심정선위수생 도존오취지이윤 공개삼분억공명 묵좌유연대황권 고금천하기승평

 

老年情興謝經營(로년정흥사경영) 늘그막의 정취가 일 꾀하기를 사절하니
剩得幽居事事淸(잉득유거사사청 ) 그윽한 살이 일일마다 청한함을 얻었네

風靜山梨時自落 (풍정산리시자락) 바람 고요한 산 돌배는 절로 떨어지는데
秋深庭蘚爲誰生(추심정선위수생) 가을 깊은 뜨락 이끼는 누굴 위해 나는가
道存五就知伊尹(도존오취지이윤) 도는 오취에 있어라 이윤을 알거니와
功蓋三分憶孔明(공개삼분억공명) 공은 삼분을 덮어라 공명을 생각하네.

默坐悠然對黃卷(묵좌유연대황권) 조용히 앉아서 유연히 서책을 대하노니
古今天下幾昇平(고금천하기승평) 고금 천하에 태평한 때가 그 얼마이던가.

 

洪大容<乾淨衡筆談> (湛軒書外集 卷2)에 두보의 이 시에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말하였다. “律呂新書朱子 序文 가운데, ‘八陣圖……가 있다 했다는데, 일찍이 얻어 보지 못했다. ”

蘭公이 말하였다. “陳壽武侯兵法을 모른다고 기롱(譏弄)하였으니, 八陣圖가 일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지금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좋아함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말하였다. “진수가 어찌 무후를 알겠는가? 팔진도는 저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만……

난공이 말하였다. “風雲鳥火의 그림은 대강 보았다. 후에 岳鄂王一이 있는데 극히 그 신묘함을 말하나, 제가 보기에는 茫然하다. 자세히 생각건대, 武侯는 실로 魏武一鋒을 필적하지 못했으니, 바람을 빌었다는 설은 후인의 好事者가 지어낸 것이요, 실은 이런 일이 없었다. 馬謖(마속)는 무후에 말미암은 것이니,三代이후 제일 인물이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그렇다하니 따라서 말들을 그렇게 하는 것이다. ”

力闇(력암)이 말하였다.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건만, 오나라 삼키려 했던 잘못 으로 남아있네.(江流石不轉遺恨失吞吳)’라고 하였으니, 그러면 杜甫의 지혜가 드디어 老兄아래 있다는 말인가?”

난공이 말하엿다. “杜詩를 어떻게 풀이하는가? 失敗를 병탄하고자 함에 말미암았는데, 國賊을 버리고 小忿을 생각하여 마침내 일을 그르쳤으니 어찌 유한이 아니겠는가?”

역암이 말하였다. “증거할 바로서는, 앞의 글귀인 공업은 세 나라의 으뜸이었고, 명성은 팔진도에서 이루어졌네.(工蓋三分國 名成八陣圖)’라는 두 구에 있다. 말을 돌려 변명한 것은 가소롭다.” [余曰 律呂新書朱子序文中 有八陣圖云云而未曾得見 蘭公曰陳壽譏武侯不知兵法 八陣圖何益于事 今人艶稱之 何也 余曰 陳壽何足以知武侯哉 八鎭則弟亦未知其何說也 欄公曰 風雲鳥火之圖 略見之 後有岳鄂王一跋 極言其神妙弟視之茫然 細思之 武侯實未敢敵魏武一鋒 祭風之說 後人好事者爲之 實無此事馬謖之敗 由于武侯 似不得爲三代下弟一人物而人云亦云也 力闇曰 江流石不轉 遺恨失呑吳 然則杜甫之智 遂出老兄何耶 蘭公曰 杜詩何解 蜀之失 由於欲呑吳 捨國賊而思小忿 卒以敗事 豈非遺恨耶 力闇曰 所證者 上有功蓋三分國 名成八陣圖二句耳 轉彎之辯 可笑 여왈 율여신서주자서문중 유팔진도운운이미증득견 난공왈진수식무후부지병법 팔진도하익우사 금인염칭지 하야 여왈 진수하족이지무후재 팔진칙제역미지기하설야 난공왈 풍운조화지도 약견지 후유악악왕일발 극언기신묘제시지망연 세사지 무후실미감적위무일봉 제풍지설 후인호사자위지 실무차사마속지패 유우무후 사부득위삼대하제일인물이인운역운야 역암왈 강류석불전 유한실탄오 연칙두보지지 수출노형하야 난공왈 두시하해 촉지실 유어욕탄오 사국적이사소분 졸이패사 기비유한야 역암왈 소증자 상유공개삼분국 명성팔진도이구이 전만지변 가소]

 

譏弄(기롱) 조롱하다. 나무라다.

艶稱(염칭) 부러워하고 매우 칭찬함.

~ (~) 어찌 ~ 하겠는가?

足以[](족이[]) 충분히 []할 수 있다 []하기에 족하다

 

李睟光<雜說>(芝峯類說16)에서 杜甫의 이 시 제 3 를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曹南冥云 朝鮮以吏胥亡國 可謂痛切 至于今日 吏胥之害滋甚 爲官者朝更暮遞 席不暇暖 而胥輩從少至老 任事自若 操縱伸縮 專在其手 非止絶簿書盜財物而已 俗謂江流石不轉以此 [조남명운 조선이리서망국 가위통절 지우금일 리서지해자심 위관자조경모체 석불가완 사서배종서지노 임사자약 조종신축 전재기수 비지절부서도재물이이 속이강류석불전이차]

 

曹南冥(曹植)朝鮮吏胥(이서)들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한 말은 그야말로 痛切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서들의 피해가 더욱 심해져, 관원이 된 자가 아침에 바뀌고, 저녁에 갈리는 식으로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을 지경인 데도, 이서들은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변함없이 일을 맡으므로, 操縱(조종)하고 伸縮(신축)하는 것이 오로지 그들 손에 달려 있고, 단지 장부와 문서를 훔치고 재물을 도둑질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세속에서 이른바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江流石不轉]’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魚叔權稗官雜記2권에서 杜甫의 이 시 제4구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老杜遺恨失呑吳구절은 동파의 꿈으로 인해서 그것이 呑吳의 잘못이 遺恨이 됨을 알았고, ‘江湖多白鳥구절은 아전들의 속담에 의해서 白鳥가 도룡뇽()임을 알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와 비슷한 것이 어찌 항두 가지에 그치겠는가.”[老杜遺恨失呑之句因東坡一夢 而知其以失於呑吳 爲遺恨江湖多白鳥之句 因使胥俗談而知白鳥之爲蛟 古今如此類者 何止一二] [노두유한실탄지구인동파일몽 이지기이실어탄오 위유한강호다백조지구 인사서속담이지백조지위교 고금여차류자 하지일이]

 

李玄錫은 그의 <八陣圖>(游齎先生集3)에서 두보의 이 시 제2를 변용하여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亂石崢嶸勢欲趨 秋天殺氣動晴湖 風雲變態時陰晦 龍虎眞形定有無 佇闢奇門呑許洛 應施地軸捲荊吳 如何未捷身先死 但使名成八陣圖 [난석쟁영세욕추 추천살기동청호 풍운변태시음회 용호진형정유무 저벽기문탄허락 응시지축권형오 여하미첩신선사 단사명성팔진도]

 

亂石崢嶸勢欲趨秋天殺氣動晴湖난석쟁영세욕추추천살기동청호

風雲變態時陰晦龍虎眞形定有無풍운변태시음회롱호진형정유무

어지러운 바위들이 가파르게 세력을 떨치려 하고

가을 하늘 찬 기운이 개인 호수를 움직이게 하네.

바람과 구름이 변해 때때로 흐리고 어두워지는데

룡과 호랑이 참모습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지 없는지.

 

佇闢奇門呑許洛應旋地軸捲荊吳저벽기문탄허낙응선지축권형오

如何未捷身先死但使名成八陣圖여하미첩신선사단사명성팔진도

우두커니 기문을 열어 허경과 락경을 병탄하고

곧 이어 지축을 돌려 초와 오의 땅을 거두었네.

어찌하여 아직 이기지 못했는데 몸 먼저 죽어

오직 팔진도(八陣圖)의 명성만을 이루게 하였는가.

 

[吾之拙見]

遺恨失吞吳에서 라고 하는 것은 제갈량이 八陣圖뿐만 아니라 三分之策 등등 神機妙策에 가까운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復興은 커녕 촉의 멸망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두보는 이 재사의 재능으로 분명히 대업을 이룰 수 있었음에도 그러하지 못한 것을 으로 묘사하였다.

팔진도는 이릉전투로 인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릉전투는 劉備가 관우의 복수전으로 일으킨 촉오전쟁이며. 八陣圖는유비의 패퇴로 인하여 백제성 영안궁으로 가기까지 드러난 제갈량의 石陣이다. 石塵으로 인해 나라 장수 육손이 추격을 멈추고 로 후퇴함으로써 유비가 무사히 영안궁으로 돌아가고 영안궁에서 축의 후사를 부탁했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에서의 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失策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八陣圖의 국경에 위치해 있는데 이 고정된 팔진도로는 오를 삼킬 수 있는 진세가 아니다. 오로지 방어용이다. 단지 두보가 石不轉으로서 오랜 세월 강물에도 흘러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고 신묘한 팔진도의 우수한 진법을 갖고도 를 삼키지 못한 실패를 하는 게 아니라, 제갈양이 계책인 촉오동맹의 파기와 이릉전투로 인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촉의 국력의 핍폐(인적, 물적)유비의 伐吳의 실책으로서 아무리 신출귀몰한 재능을 가진 제갈량으로서는 한계가 있어 결국은 촉의 부흥을 실현치 못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것이 두보가 묘사한 이라 보겠다.

또 하나는 伐吳의 실패로 붕어한 劉備의 죽음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유비(先主)와 그의 아들 유선(後主)의 재능은 천지차이이다. 만약 유비가 伐吳에 실패하였더라도 죽지 않았더라면’‘와신상담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인데 에 대한 정벌에 있어서의 북벌(은에 대한 공격)을 훨씬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제갈량이 소위 한의 부흥이라는 기치아래 北伐을 단행했을 때의 유선(후주)은 늘 우유부단하여 공명의 북벌이 지연되고, 승기까지 놓치는 후방에서의 지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유비가 건재했더라면 의 도움까지도 얻을 수 있는(?) 상황하에서 의 북벌까지 가능했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을 유추할 수도 있다.

따라서 위 시에서의 이라 함은 오로지 諸葛亮理想復興이루지 못한 것이 전적으로 유비의 감정이든 아니든 유비가 일으킨 이릉전투로 인해 조장된 피치 못할 상황이 제갈량의 으로도 묘사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비의 최후의 전투 "이릉전투"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mem000014b80001.gif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pixel, 세로 1pixel

 

유비가 백제성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기 전 마지막, 최후의 전투가 이릉전투로서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갚기 위해서 자그마치 75만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한 전투라고 하나 삼국지연의 이야기이고, 실제는 양군합해서 15~20만 정도라는 정론이 있다..

이 전투는 유비가 오나라에 참패를 당하게 되는데 상황을 말하자면 유비가 끌고 온 75만 대군은 매우 큰 규모로 오나라가 정면승부를 하면 십중팔구 패배하는 전투였다. 하지만 오의 군사인 육손이 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가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불던 날랜 군사들에게 불을 지르게 한다. 일렬로 800여리나 되는 촉의 영채는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게 되면서 언제 있었냐는 듯이 다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피하려는 군사들도 매복하고 있던 오나라 병사들에 의해 대 학살이 되었는데 유비 또한 이처럼 죽을 상황에 처인 순간 조자룡이 유비를 구하면서 간신히 명을 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고 백제성에서 죽게 되는데, 이 전투를 이릉전투 또는 효정대전이라고 이른다..

출처:중국 상하 오천년 사

 

참고 도서

 

唐詩三百首詳析<대만 : 中華書局 편집부, 1955>,

唐詩三百首<傳統文化硏究會 송재소외5인 역주, 2012>,

唐詩三百首<啓明大學 出版部 구섭우 편저, 安秉烈 譯,2005>,

唐詩選 <보고사 奇泰完 選譯 2008>,

唐詩三百首<동서문화사 林東錫, 孫洙編 釋註 2010>,

唐詩選<명문당, 金學主 역저, 2003>,

漢詩理解<一志社, 중국편, 조두현, 2003>,

[사진출처] [당시삼백수]八陣圖(팔진도) - 杜甫(두보)|작성자 swings81

                                                                                                                                                                <2016. 12. 05. 孤松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