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法 [시법]
詩法 [시법]
○ 學詩先除五俗 : 一曰俗體, 二曰俗意, 三曰俗句, 四曰俗自字 五曰俗韻.
[학시선제오속 : 일왈속체, 이왈속의, 삼왈속구, 사왈속자자 오왈속운.]
시를 배우는 데는 먼저 오속(五俗)을 제거해야 하는데, 첫째 속체, 둘째 속의, 셋째 속구, 넷째 속자, 다섯째 속운이다.
俗體 : 當時에 성행했던 應酬詩(시인들이 서로 겨루기 위해 주고받은 시)같은 것을 말한다. 意味가 없으며, 말의 풍성함이 미미하다. 試帖과 같은 類가 그것인데, 지금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俗意 : 頌禱(頌祝:경사를 기리고 축하함.)를 잘한 것으로, 아첨하여 잘 어울려 超逸(超脫:어떤 한도나 표준 따위를 벗어나거나 뛰어넘음)한 뜻이 없다.
俗句 : 前例를 좇아 표절하는 것으로, 부패한 氣가 종이에 가득한 것이다.
俗字 : 바람 구름 달 이슬 등 비슷한 類의 글자가 미친 것으로 새로운 뜻이 없는 것이다.
俗韻 : 기괴하고 험난하며, 탐욕스러움이 많은 야비하고 속된 곡조.
○ 有語忌, 有語病. 語病易除, 語忌難除. 語病古人亦有之, 惟語忌卽不可有. 須是本色, 須是當行.
[유어기, 유어병. 어병이제, 어기난제. 어병고인역유지, 유어기즉불가유. 수시본색, 수시당행]
말에는 꺼리는 것(語忌)이 있고, 병통이 되는 것(語病)이 있다. 어병은 쉽게 제거할 수 있으나, 어기는 제거하기 어렵다. 어병은 옛 사람도 또한 있었으나, 어기만은 있어서는 아니 된다. 모름지기 이것이 본색이고, 이것이 마땅히(詩作에 있어서) 행할 일이다.
語忌 : 저속한 말로써 사용해서는 안되는 말.
語病 : 作家가 공려하지 못하고, 단련하지 못하여 때로는 지식이 부족해서 나오는 용어상의 결함.
○ 對句好可得, 結句好難得, 發句好尤難得. 發端忌作擧止, 收拾貴在出場. 不必太著題, 不必多使事. 押韻不必有出處, 用事不必拘來歷. 下字貴響, 造語貴圓.
[대구호가득, 결구호난득, 발구호우난득. 발단기작거지, 수습귀재출장. 불필태저제, 불필다사사. 압운불필유출처, 용사불필구내력. 하자귀향, 조어귀원.]
대구가 잘된 것을 얻을 수 있으나, 결구가 잘된 것은 얻기 어렵고, 발구가 잘된 것은 더욱 얻기가 어렵다. 발단은 거지(擧止)함을 꺼리고, 수습의 귀함은 출장(出場)에 있다. 반드시 제목을 크게 나타낼 필요가 없고, 반드시 용사를 많게 할 필요가 없다. 압운은 반드시 출처가 있을 필요가 없고, 용사(用事)도 그 내력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 글자를 씀에는 소리를 귀하게 여기고, 말을 만들 때는 원만한 것을 귀하게 여긴다.
發端忌作擧止, 收拾貴在出場 : 首句에서는 크게 짓는 것(지나치게 일부러 꾸미고 과장하는 것.)을 꺼리며, 結句에서는 먼 곳을 바라보는 유창하고 초월한 맛(여운)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 意貴透徹, 不可隔靴搔癢 : 語貴脫洒, 不可拖泥帶水. 崔忌骨董, 崔忌趂貼. 語忌直, 意忌淺. 脉忌露.味忌短,音韻忌散緩,亦忌迫促.
[의귀투철, 불가격화소양 : 어귀탈쇄, 불가타니대수. 최기골동, 최기진첩. 어기직, 의기천. 脉忌露.미기短, 음운기산완, 역기박촉.]
뜻은 투철함을 귀하게 여기니, 격화소양(隔靴搔癢)할 수 없다. 말은 탈쇄(脫洒)를 귀하게 여기며, 타니대수(拖泥帶水)할 수 없다. 가장 꺼리는 것은 골동(骨董)과 진첩(趂貼)이다. 말은 뻣뻣한 것을 꺼리고, 뜻은 척박한 것을 꺼리고, 맥은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맛은 짧은 것을 꺼리고, 음운은 산만한 것을 꺼리고, 또 촉박한 것을 꺼린다.
隔靴搔癢 : 신을 신고서 가려운 곳을 긁는다는 뜻으로‘일을 하느라고 애는 쓰는데, 정곡을 찌르지 못해 답답함’을 이르는 말이다.
脫洒 : 험한 것을 벗어남을 말한다.
拖泥帶水 :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 스스로 물에 들어가서 흙탕물을 뒤집어 쓰며 물에 빠지는 행동을 말한다. 轉하여 불법을 體得한 사람이 상대의 수준까지 내려와 친절하게 지도교시(指導敎示)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骨董 : 古字 古語를 많이 취하여 故事를 나열하는 것을 말함.
趂貼 : 뒤쫓아서 편의에 맞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 詩難處在結裹, 譬如番力, 須用北人結裹, 若南人便非本色, 須參活句, 勿參死句. 詞氣可頡頏, 不可乖戾.
[시난처재결과, 비여번력, 수용북인결과, 약남인편비본색, 수참활구, 물참사구. 사기가힐항, 불가괴려.]
시에서 어려운 곳은 마무리에 있는데, 비유컨대 번도(番刀)모름지기 北人의(시에서) 마무리로 써야지, 만약 南人의(시에서) 마무리로 쓰면 곧 본색이아니다. 모름지기 活句를 參句해야지 死句를 참구해서는 안된다. 말의 기운은 힐항(詰抗 :詰拒) 해야지 괴려(乖戾)해서는 안된다.
番力 : 오랑캐의 칼을 이름이다.
活句·死句 : 선종의 말에 사활구(死活句)가 있다. 意路가 통하지 않고 의미가 없는 句를 活句라 하고, 의미가 있고 의로에 통하는 것을 死句라 한다. 『林間錄(임간록)』上에 “동산초선사가 말하기를 ‘말 가운데 말이 있는 것을 사구라 하고, 말 가운데 말이 없는 것을 활구라 한다’고 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詰抗(詰拒) : 목 줄기가 굳세다는 뜻에서 남에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서로 트집을 잡아 거론하며 맞서 싸움.
乖戾 : 사리에 어그러져 온당하지 아니함을 뜻한다.
※ 『불교평론』의 <대혜종고의 공안선 비판과 간화선에 지(知)1)의 문제 / 박재현> 일부 퍼옴
2) 활구(活句)와 사구(死句)
선문답에 불과했던 초기 공안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루어졌던 다이얼로직(dialogic)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일체의 모방행위를 허용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일회적인 사건이어서 정보로 축적되지 않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오히려 경계했다. 그런데 “당(唐)에서 주창한 제자의 유도(誘導)와 편달을 위한 단순한 공안은, 송에서는 ‘화려한 언구’로 가미된 백칙(百則)의 공안이 되어 납자들은 도리어 안일하게 사량복탁(思量卜度)에 빠지는 우려성을 갖게 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13)
또 ‘공안’이라는 명칭에는 이미 제도화된 규정이나 법령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공안은 관청의 문서에 비유될 수 있다. ……공이란 뜻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며, 안이란 뜻은 기필코 불조(佛祖)의 깨달음과 동일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14) 이처럼 표준화되고 텍스트화되고 지식화된 공안이 수행 시스템으로 정착된 공안선은, 처음의 그것과는 달리 오히려 이미테이션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했다.
간화선에서 기존의 공안선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하면서 들고 나온 개념이 활구(活句)이다. 활구는 공안이 표준화되고 텍스트화됨으로써 본래의 활발발(活潑潑)을 상실한 ‘죽은 말귀’[死句]가 되고 말았다는 비판적 문제의식에서 배태된 것이다. 간화선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는 참구하지 말라.”15)는 경구는 송대 선지식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던 이러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것이었다. 대혜는 이렇게 말한다.
문자를 찾아 인증하고, 어지럽게 헤아려서 주석하고 해석하는 일을 절실하게 꺼려야 한다. 비록 그렇게 주석하고 해석하여 분명해지고 설명하여 딱 맞아떨어진다고 해도 이 모두가 죽은 사람의 살림살이에 불과하다.16)
대혜는 공안선을 선에 대한 일종의 주지주의적 접근방식으로 파악했다. 이는 이미 당말 고문학파의 도마 위에 올랐던 훈고학(訓?學)과 주소학(註疏學)을 근간으로 하는 공부방식의 불교적 변형이다. 대혜는 바로 이와 같은 학문 전통을 죽은 사람의 살림살이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혜가 오조법연 이후의 임제종의 수행법인 무(無)자 중심의 간화 수행을 계승하여 사구에 참구하지 말고 활구를 참구할 것을 특히 강조한 것 역시 문자언어와 지해(知解)의 작용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다.17)
송대 문자선(文字禪)을 대표하는 혜홍각범(慧洪覺範, 1071∼1128)은 “말 속에 말이 있는 것을 사구라 하고 말 속에 말이 없는 것을 활구라 한다.”18)고 했다. 여기서 사구와 활구를 나누는 핵심적인 단어는 어중유어(語中有語)과 어중무어(語中無語)이다. 앞의 ‘말(語)’이 언표인데 비해서, 뒤의 ‘말’은 언표 속에 내포되어(혹은 약속되어) 있는 의미이다. 그런데 의미 역시 말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구가 어중유어라는 표현은, 말 속에 또 말이 있는 끝없는 말들의 잔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활구는 말 속에 또 다른 말이 없다. 기표 속에 숨겨진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결국 “수참활구 막참사구”라는 경구는, 주지주의적 학문방식에 대한 비판의식 혹은 약속된 의미찾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활구와 사구의 경계는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활구가 부유하는 공안이라면, 사구는 정박(碇泊)하고 있는 공안이다. 더 이상 떠돌지 않으면 죽은 공안이요, 쉼 없이 떠돌아야 살아 있는 공안, 곧 활구가 된다. 하지만 활구에 속하는 공안과 사구에 속하는 공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똑같은 공안이라도 한 때는 활구였다가 사구가 되곤 한다. 조주를 찾아갔던 어떤 수행자에게 뜰앞의 ‘잣나무’가 활구였다면, 《조주록(趙州錄)》을 펼치는 또 다른 수행자에게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는 사구이다. 그렇다고 해서 맨 처음, 시원(始原)만 활구의 가치를 담보하란 법은 없다. 정전백수자가 조주를 찾아갔던 어떤 수행자의 눈에 비친 잣나무처럼 그렇게 다가올 때, 그것은 여전히 활구이다.
선불교에서 공안이 사용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진리를 말하거나 지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전통적인 불교의 관점을 넘어서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안의 사용은 경전에 대한 수사학적 관점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며, ‘떠도는’ 진리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19)
활구를 근간으로 하는 간화 수행은 사구화된 공안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조사선의 생동감을 되살려 내려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특정 공안을 둘러싸고 있는 결정적인 조건들을 무화해야 한다.
공안에서 중요한 점은 ‘텍스트의 상대적 자율성’이다.20) 공안이라는 특수한 언어가 갖는 이와 같은 수행적(performative) 기능을 함축한 표현이 바로 활구라는 개념이며, 이는 또 의사소통적 기능에 주안점을 두는 사구와 비교된다.21) 활구란 글자 그대로 죽은 공안이 아니라 활발발한 공안이다. 활구는 그것도 어차피 글(句)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지적(知的)이다. 하지만 그것은 약속된 의미 찾기에 머물러 있는 주지주의적 학문경향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간화라는 말에는 사구를 활구화하고자 하는 대혜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대혜의 비판의식은 당대 유학을 딛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주희(朱熹)에게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주희는 대혜와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대유(大儒)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다. 주희가 전하는 대혜의 선사상을 먼저 살펴보자.
도(道)의 체(體)와 용(用)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다. 옛날의 성인은 [이와 같은 이치를] 이미 깊이 터득하였으나 뒷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그래서] 주장을 수립하고 가르침을 내리되 근본적인 데서부터 세세한 데까지 이르니, 후인들을 일깨우고 가르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배우는 사람들은 그 책을 숙독하고 그 의미를 정밀히 궁구하며(熟讀其書 精求其義)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참실함을 확인하고 사물에 적용해서 그 [가르침의] 타당성을 검증해야 한다.
이렇게 일상에서 [성인의 가르침을] 외고 생각하며 마음에 두고서 직분에 임하거나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면, 모든 일이 다 자신에게 절실할 것이다. …… 책을 읽되 글의 뜻을 탐구하지 않고, 깊이 고찰하되 [자신의] 의견이 없는 것(讀書不求文義, 玩索都無意見)은, 바로 요즘 불가에서 말하는 화두를 본다(看話頭)는 것이다.22)
주지하다시피 주희는 유학 전통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킨 사람이다. 주희의 말 가운데 “책을 숙독하고 그 의미를 정밀히 궁구하며”까지가 바로 그 이전의 훈고학적 학문방법론을 한마디로 설명한 것이다. 물론 주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참실함을 확인하고 사물에 적용해서 그 [가르침의] 타당성을 검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주자학을 의리지학이라고 칭하는 근거가 된다.23)
간화의 학문적 경향을 “책을 읽되 뜻을 탐구하지 않고, 깊이 고찰하되 [자신의] 의견이 없는 것”으로 파악했던 주희의 판단은 상당히 적확한 것으로 보인다. 주희의 말은 대혜가 제출한 간화선법이 공안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간화는 일단 각종 공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있다느니(有), 없다느니(無) 하는 문자상의 의미치를 따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그 공안에 대해 내 생각은 이러이러하다는 식으로 진도를 나가서도 안 된다. 적어도 이 두 가지 태도를 견지하고 있어야 화두를 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첫 번째 태도이다. 두 번째 태도는 첫 번째 것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글자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되는가. 선어(禪語)는 본래 의미 없는 말(無義語)24)이고, 무의어는 선어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남송 말엽의 중봉명본(重峯明本, 1263∼1323)은 《천목중봉화상어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쓰이는 말(語言)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 입 밖으로 나온 것이니, 곧 [말한 사람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므로 의미 없는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다. …… 뜻(義)은 [먼저] 감정의 움직임이 있은 다음에 [그것을] 의식이 주재하여 언어로 펼쳐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대체로 말은 모두 감정과 의식이 화합된 뜻을 본떠서 재주를 부린 것이다. …… 무릇 감정이 있는 것들은 [모두] 한 번 소리를 지르면 그 속에는 반드시 주장하려는 뜻이 들어 있게 마련인데, 단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말과 말소리가 있는데 어찌 [그 말에 담긴] 뜻이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 부처와 조사들의 도(道)는 이와 다르다. …… 조사의 도가 동쪽으로 건너와 양종과 오파로 [분할되어] 하늘의 별과 바둑판 위의 돌처럼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말을 살펴보면, ‘수미산(須彌山)’이나 ‘시심마(是甚큯)’ …… 등의 말들이 떠들썩하니 이어져 마치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아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되었다. …… 이미 말과 침묵으로도 알 수 없으니 지식으로는 더더욱 알 수 없으며, 뭇 귀신들조차도 어찌 할 수 없으므로 이것을 가리켜 의미 없는 말(無義語)이라 한다.
의미 없는 말은 희노애락의 범주를 초월하였고, 알음알이의 범주를 벗어났으니, 또 어떻게 경전의 문자와 나아가 성인이니 범부이니 하는 이름과 겉모습 따위로 알 수 있겠는가? …… 의미를 찾는 마음(意根)에 한발짝 들여 놓으면 모두가 의미 있는 말(有義語)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가령 부처와 조사의 도가 이것(의미 있는 말)에 불과하다면 장차 어떻게 생사망정(生死妄情)의 뿌리를 끊을 수 있겠는가? 이는 반딧불을 모아서 수미산을 밝히고, 표주박을 들고 바닷물을 헤아려 보겠다고 덤비는 것이라 하겠다.25)
중봉은 세간의 말과 선어(禪語)를 ‘의미 있는 말’과 ‘의미 없는 말’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의미라는 것은 기표가 내포되어 있는 발언자의 감정과 주장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유의어란 발언자의 감정과 주장이 내포된 기표이다. 따라서 이 유의어에서 중요한 것은 발언자가 언표 속에 담은 뜻을 파악하는 것, 즉 앞서 주자가 말했던 ‘의미를 구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유의어의 한계는 인용문의 말미에서 드러난다. 이 비유에서 수미산과 바닷물은 숨겨진 의미를 가리키고 반딧불과 표주박은 그것에 대한 갖가지 파악, 즉 해석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유의어로서의 기표를 아무리 집적하고 고찰해도 대상은 결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가 바로 중봉이 간화선의 관점에서 지적하는 유의어의 한계인 것이다.
선어가 무의어라는 것은 이와 같은 유의어적 인식방법에 대한 반성과 재고를 의미한다. 공안은 물론 기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애초부터 의미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도록 기안된 기표이다. 공안에는 발굴해야 할 의미가 묻혀 있지 않다. 개(犬)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이나 없다는 말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차피 처음부터 어떤 의미를 담고 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화두가 되고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말을 들어도 화두가 된다. 심지어 앞부분은 몽땅 빼 버리고 그냥 ‘없다(無)’고만 해도 화두로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이런 화두가 다시 유의어(有義語)로 변질된 것, 즉 사구화된 것이 이른바 공안선이다. 공안선은 발언자가 선문답 속에 함축했을는지도 모르는 의미찾기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제출된 간화선은 유의어로 변질된 기존의 공안을 무의어로 되돌려 놓고자 한다. 예컨대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를 말하면서 생각했던 의미치와 그 선문답을 두고 있어 왔던 각종 주석들을 기각함으로써, 수행자로 하여금 생전 처음 보는, 아무런 의미도 내포하지 않은, 낯선 ‘뜰 앞의 잣나무’와 직접 마주보도록 하는 것이 바로 간화선이다.
간화에는 봄(看)이라는 ‘지금 여기’의 직접성과 현재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간(看)은 공안선 수행법이 내포하고 있는 주지주의적 경향의 공부방식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그렇다면 간화선에서는 지각작용을 어떻게 취급하는가
○ 律詩難於古詩 ; 絶句難於八句 ; 七言律詩難於五言律詩 ; 五言絶句難於七言絶句
[율시난어고시 ; 절구난어팔구 ; 칠언율시난어오언율시 ; 오언절구난어칠언절구]
율시는 고시보다 어렵고, 절구는 율시보다 어렵다. 칠언율시는 오언율시보다 어려우며, 오언절구는 칠언절구보다 어렵다.
○ 學詩有三節 : 其初不識好惡, 連篇累牘, 肆筆而成,: 旣識羞媿, 始生畏縮, 成之極難, ; 及其透徹, 則七縱八橫, 信手拈來, 頡頏是道矣.
[학시유삼절 : 기초불식호악, 연편누독, 사필이성,: 기식수괴, 시생외축, 성지극난, ; 급기투철, 칙칠종팔횡, 신수념래, 힐항시도의]
시를 배움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여 잇달아 여러 편을 멋대로 지어서 이룬다. (그 다음으로)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 비로소 萎縮(위축)이 생겨 짓기가 극히 어렵다. (마지막으로) 투철(透徹)함에 이르면, 칠종팔횡하고 信手하여 쓰는 것이 곧 道가 된다.
七縱八橫 :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 놓아주고, 여덟 번 사로 잡았다는 고사에서 ‘마음대로 잡았다가 놓아 줌’을 이르는 말이다.
信手 : 손을 마음대로 움직임을 뜻하는 말이다.
拈來(념래) : 字句를 생각해 냄.
○ 看詩須着金剛眼睛, 庶不眩於房門小法. - 禪家有金剛眼睛之說 -
辨家數如辨蒼白, 方可言詩. - 荊公評文章, 先體製而後文之工捽. -
詩之是非不必爭. 試以已詩置之古人詩中, 與識者觀之而不能辨, 則眞古人矣.
시를 볼 때에는 금강안정(金剛眼睛)을 지니고, 방문소법(房門小法)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선가에는 금강안정의 설이 있다.
푸른 색과 흰 색을 구분하듯이 대가의 솜씨를 구분할 수 있어야만, 바야흐로 시를 말할 수 있다. - 형공은 문장을 평함에 체제를 우선하고, 글의 기교는 뒤로 하였다.
시의 시비는 다툴 필요가 없다. 먼저 자기의 시를 옛 사람의 시 가운데 두고, 안목이 있는 사람에게 보여 능히 구별할 수 없게 되면 , 진실로 옛 사람의 시이다.
金剛眼睛 :선문에서 가장 견고하면서도 중요한 것이라는 뜻으로, 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房門小法 : 正道에서 벗어난 곁가닥의 잔재주란 말이다.
≪滄浪詩話 ≫( 嚴羽 著. 裵奎範 譯註, 다운샘출판사, 1997)
2016.12.08. 孤松 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