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숭원의 연구에 의하면 노천명은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난다. 홍역을 심하게 앓고 기사회생한 후 그 기쁨에 이름 기선(基善)을 천명(天命)으로 고쳐 호적에 올렸다고 한다. 보통학교 입학 후 부친의 죽음으로 서울로 이주하여 진명보통학교와 진명여고보, 이화여전 영문과를 거쳐 문학적 수련을 하게 된다. 고향을 떠나온 상실감과 부친과 모친을 연이어 잃은 슬픔은 감수성을 점점 더 예민하게 만든다.
학창 시절 운동도 잘하고 시를 잘 쓰는 문학소녀로 이름을 날렸던 노천명은 이화여전 시절 변영로, 김상용의 지도를 받으며 ‘신동아’에 ‘포구의 밤’이란 시를 발표하고 교지 ‘이화’ 4호에 시조 ‘어머니의 무덤에서’를 발표하기도 한다. 졸업 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고 극예술연구회에도 참여해 1934년 안톤 체호프의 ‘앵화원(벚꽃동산)’을 공연하기도 한다. 공연 중 유부남인 보성전문학교 경제학 교수 김광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된다. 윤리적 자의식이 강했던 노천명의 성격상 이 사랑은 오래갈 수 없었다. 이후 노천명은 평생 독신으로 산다.
노천명은 1935년 ‘시원(詩苑)’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해 주목을 받게 되고, 그 여세로 1938년 첫 시집 ‘산호림’을 자비 출간한다. ‘여성’지의 편집기자로도 일하게 되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2년 2월 ‘조광’지에 실은 ‘기원’을 시발로 수편의 친일시와 산문을 쓴다. 해방 이후 이때의 행적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소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서울신문사와 부녀신문사에서 일한다.
한국전쟁기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던 노천명은 서울 수복 후 부역 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2년 형을 받았으나 주변 문인들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풀려난다. 이때의 체험은 그의 영혼과 육체에 큰 생채기를 내게 된다. 휴전 후 중앙방송국에 촉탁직으로 근무도 하고 ‘이화 70년사’ 편찬에 관여하던 중 1957년 재생불능성 빈혈로 쓰러진 후 6월 16일 자택에서 운명한다. 시집에 ‘창변’(1945), ‘별을 쳐다보며’(1953) 수필집에 ‘산딸기’(1950), ‘나의 생활백서’(1954), ‘여성서간문독본’(1955) 등이 있다.
노천명(盧天命) 옛집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 골목을 뒤지다가
노천명(盧天命)이 살던 집을 지나게 되었다.
사진 : 노천명(盧天命) 옛집. 골목 끝-앞에 자동차가 서 있는 집이다. 종로구 누하동 226 (필운대길 34-9)
사진: 구글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1938년 노천명의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에 실린
‘사슴’은 우리 때 교과서에도 올라 있었다.
노천명(盧天命, 1912~1957)
노천명은 1912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무역으로 돈을 벌어 집은 유복했다. 위로 아들이 하나 있으나
잇달아 딸을 낳자 부모는 아들 낳기를 바라며 천명에게 사내아이의 옷을
입혀 키웠다고 한다.
사진 : 노천명 1
1920년 아버지가 죽자 서울로 이사하여 진명고녀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그 해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가 되었다.
사진 : 노천명 4
이상 출생과 학력으로 볼 때 1920-30년 대 식민지 조선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부르주아 엘리트 신여성임에 틀림없다.
이런 노천명의 초기 시(詩) 주제는 고독과 고향이었다.
고향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 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홋잎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은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斑馬)처럼
향수가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원제(原題)는 망향이라는데 고향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혼자 고독이나 씹고 고향타령 하는 것이 일제하-그 암울한 시기를 맞은
작가의 시대정신으로 마땅하느냐는 의문도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투사일 필요는 없고 투사라고 싸움만 할 수 없지 않은가?
또 당시 여성교육이 삼종지의(三從之義)까지는 아니라도 여필종부(女必從夫) 하는
현모양처(賢母良妻)를 길러내는 데 중점이 있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다음 시(詩)들이다.
부인 근로대
부인 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을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최정희, 모윤숙 등 여류가 주도한 소위 총후문학(銃後文學)의 하나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대동아전쟁 (2차 대전)을 일으키며 펼친
1억 총궐기니 하는 삼엄한 국가총동원 체제에서 살자고
한 편 썼다고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총후란 후방을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면이 분명히 있다.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남아라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사나이였다면 뭘 어쩌려고?
이런 시를 어떤 신념 없이 쓸 수 있을까?
다른 시를 더 읽는다.
군신송(軍神頌)
사진 : 군신송-매일신보 (서원대 한국교육자료 박물관 소장)
항시(恒時)
거룩한 역사(歷史)엔 피가 흘럿다
아름다운 장(章)우엔 희생(犧牲)이 잇섯다
유리(瑠璃)가치 맑은 하늘아레
조국(祖國)은 지금 고요히
세기(世紀)의 거체(巨體)------
새 아세아(亞細亞)를 바로잡고 잇다
아프로 아프로 오직 돌진(突進)이잇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특공대(大日本特攻隊)는
남방(南方) 거친 파도(波濤)우에
혜성(彗星)모양 장엄(莊嚴)하게 떠러젓쓰리
싸흠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네거리를 지나며
십이월(十二月)의 하늘을 우러러본다
어뢰(魚雷)를 안고 몸으로
적기(敵機)를 부신 용사(勇士)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薔薇)처럼 핀다.
나치스에 모든 독일지식인들이 할 수 없어 따랐던 것은 아니다.
상당수는 독일-아리아인의 영광을 진심으로 믿었다.
해방 후 친일파 대부분은 일제시대 살아 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느니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했을 것이라는 변명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글에는 내선일체(內鮮一切)로 천황폐하의 적자(赤子)가 되어
세계로 진군하는 조국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진심으로 믿은 흔적이 분명히 있다.
싱가폴 함락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의 독아에서
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新嘉披)를 뺏아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를 조상하는 만종을 울려라.
하략(下略)
노천명은 이런 군국일본을 기리는 시를 쓰다가 해방을 맞더니만
6·25 가 터지고 서울에 남았다가 9·28 수복 후 부역(附逆)으로 감옥에 간다.
이적죄로 20년 형을 선고 받으나 동료 문인들의 탄원으로 6개월 후 풀려 난다.
가까스로 감옥에서 나오지만 몸이 극도로 약해져 1957년 3월 서울 위생병원에서
뇌빈혈로 죽는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일본제국에서 대한민국을 거쳐 적치(赤治)하에 갔다가 다시 대한민국으로 오는 일이
6-7년 안에 다 일어났다. 아무리 개인이 머리를 돌린들 감당이 되겠는가?
평화로운 때라면 내용은 별 없지만 고독과 향수타령하며 그저 예쁜 시를 쓰며
무난히 지냈을 가녀린 여인을 이 사회가 지키지 못한 면도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보면 노천명 개인적으로는 운이 되게 없다.
노천명 포함 친일문학가의 친일행태와 그 예술은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필자가 비록 문학을 모르지만 작가와 작품을 가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으니 인간적 비난은 어려워도 저렇게 일본제국의 영광을
노래한 시인의 시를 교과서에 까지 올린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상 2007년 6월 10일 노천명 옛집을 지나며 든 생각 정리.
출처 :구룡초부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