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문교실/☞ 韻과 聲調

신숙주와 운서

착한 인생 2019. 2. 2. 05:58

신숙주와 운서

 

  




1. 한자음(漢字音)과 운서

 

신숙주(1417∼1475)는 세종 시대(1419∼1450)에, 운서 관련 사업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그러면 신숙주가 어떠한 학문적 배경 아래에서 이러한 사업에 종사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 대륙에 사는 여러 민족 가운데, 한족(漢族)이 쓰는 말을 한어(漢語)라 하고, 이 한어를 기록한 한자의 음을 한자음 또는 자음(字音)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어의 어음은 20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표음 문자인 로마자(音文字)로 기록될 때까지 한자의 음으로만 기록되어 왔으므로, 한어의 어음사를 흔히 한어의 자음사라고 한다.

 

중국 대륙에서 이러한 한어의 자음 표시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시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반절법(反切法)이다. 반절법이란 두 자음을 이용해서 하나의 자음을 나타내는 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東 德紅切'이라고 했을 때 '德/t k/'(이것을 흔히 反切上字라고 함)을 가지고 '東/tu /' 자음의 /t/를 나타내고, '紅/ u /'(이것을 흔히 反切下字라고 함)을 가지고 /u /을 나타내게 하여 반절상자와 반절하자의 결합으로 '東/tu /'(이것을 反切歸字라고 함)이라는 자음을 표시하는 방식이다.

 

한족이 이러한 반절법을 쓰게 된 것은 후한 때의 손염(孫炎 220?)부터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족이 옛날부터 하나의 자음(字音)을 첫머리 요소인 어두자음(語頭子音)과 그 나머지 요소인 운(韻)으로 나누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족은 반절법을 마련하기 전부터, 자음들 가운데 어두자음이 같은 한자들을 쌍성어(雙聲語)라 하고 그 나머지 요소가 같은 한자들을 첩운어(疊韻語)라 했었다.

 

한족이 이와 같이 하나의 자음(字音)을 어두 자음(이것을 聲이라고 함)과 운으로 나누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은, 한시(漢詩)라고 하는 그들의 시를 짓는 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한족은 시를 지을 때, 압운(押韻)이라고 해서 운을 맞추는 규칙이 있었다. 압운은 완전히 똑같은 운을 가진 자음끼리 꼭 맞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같은 운들끼리 맞추어서 시를 짓는 것이 대원칙이었다.

 

따라서 '운'에 대한 인식이 강해지자 '운'을 분류하여 정리한 운 중심의 '자음사전(字音辭典)'이 편찬되었다. 기록상으로는 일찍이 위(魏 220∼265)나라의 이등(李登)이 '성류(聲類)', 진(晋 265∼316)의 여정(呂靜)이 '운집(韻集)'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진나라가 중국의 남쪽인 양자강 유역으로 옮겨 오게 되어 중국 대륙이 남북으로 갈리어 남북조 시대(317∼580)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남조 사람들은 시 짓기에 더 힘을 기울이고 음운 연구도 활발히 하였다. 때마침 글을 짓고 시를 읊는 사람들 사이에 한어에 평 상 거 입이라는 네 종류의 성조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어, 운들을 성조를 기준으로 해서 분류하는 방법도 생겼다.

 

4성을 처음으로 의식한 사람은 양(梁 502∼557)나라의 심약(沈約, 441∼513)이며 『사성보(四聲譜)』를 지었다고 한다. 또 북제(北齊, 550∼577)의 양휴지(陽休之)가 『운략(韻略)』을 지었는데 모두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하후영(夏侯詠)의 『운략(韻略)』, 주사언(周思言)의 『음운(音韻)』, 이계절(李季節)의 『음보(音譜)』, 두대경(杜臺卿)의 『운략(韻略)』 등 몇 종류의 운서가 더 있었는데, 수(隋)나라의 육법언(陸法言)이 이들을 집대성하고 동지 여덟 사람과 토의 끝에 601년(隋 인수 원년)에 『절운(切韻)』을 편찬하였다. 193운으로 된 『절운』은 모든 한자를 자음의 성조에 따라 평 상 거 입 4성으로 나누고, 같은 운모음(이를 大韻이라고 함) 별로 운을 나누어 한자들을 배열하되, 같은 운 안에서는 성모까지도 같은 한자들(이를 小韻들이라고 함)을 한 곳에 모아서 배열하였다.

 

이 『절운』은 당나라 때 증보되어 왕인구(王仁煦)의 『간류보결절운(刊謬補缺切韻』, 손면(孫 )의 『당운(唐韻)』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송 시대에 이르러 『절운』 계통의 당 시대 운서들을 모아서 교정한 『광운(廣韻)』이 1008년에 간행되었다. 『광운』은 206운으로 되어 있으나 『절운』의 체계와 큰 차이가 없으므로 한어의 중고음 연구의 기본적인 운서로 이용되고 있다.

 

다시 북송 대에는 과거 응시용으로 『광운』을 간략하게 만든 『예부운략(禮部韻略』이 1037년에 간행되었다. 뒤이어 금(金) 시대에는 『예부운략』의 운목을 107운으로 줄인 유연(劉淵)의 『임자신간예부운략(壬子新刊禮部韻略)』이 1252년에 간행되었다. 또 같은 계통을 이은 왕문욱(王文郁)의 『신간운략(新刊韻略)』에서는 106운으로 줄었다. 『신간운략』 등은 시인들이 한시를 지을 때 압운의 기본으로 하였으므로, 흔히 '시운(詩韻)' 또는 '평수운(平水韻)'이라고 하였다.

 

남송 때부터 원나라 때까지 살았던 황공소(黃公紹)는 107운으로 된 『고금운회(古今韻會)』를 지었으나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웅충(熊忠)이 1297년에 이 운서를 간략하게 만든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만 전해 오고 있다. 원의 주종문(朱宗文)은 1269년에 만들어진 파스파(八思巴, 'Phagspa, 팍파글자) 글자로 자음을 표기한 『몽고자운(蒙古字韻)』을 1308년에 지었고, 주덕청(周德淸)은 보수적인 운서에서 대담하게 벗어나 구두어를 기초로 한 『중원음운(中原音韻)』을 1324년에 편찬했다.

 

명나라를 건국하자 자음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명의 태조는 『홍무정운(洪武正韻)』을 편찬시켰다(1374 완성, 1375 간행). 여기에서 명나라 초기까지 중국에서 편찬된 운서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했는데, 당나라 말기부터 북송 때에 이르는 사이에 어두 자음인 성모를 정리한 36자모표가 완성되자, 이 36자모표와 운모를 결합시켜서 자음을 표시하는 '운도(韻圖)'가 만들어졌다. 운도는 36자모를 가로(橫)에 배열하고 세로(縱)에 4성 별로 운모음(주로 핵모음 기준)을 4등으로 나누어 배열하여 그 결합으로 자음을 나타내는 음운표다. 운도에는 송나라 장인지(張麟之)의 서문(1161)이 붙은 『운경(韻鏡)』, 송의 정초(鄭樵, 1104∼1162)가 지은 『통지(通志)』 안의 '칠음략(七音略)', 사마광이 지었다고 전해 온(실지로는 다른 사람이 지었다고 함) 『절운지장도(切韻指掌圖)』등이 있다. 또 이들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지만 역시 일종의 운도인 소옹(邵雍, 1011∼1077)의 '황극경세성음도(皇極經世聲音圖)'가 있다.

이상으로 중국 대륙 안에서 운서 및 운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달해 온 중국 음운학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면 중국 음운학이 이 땅에 전래되어 온 경위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중국 음운학의 전래

 

이 땅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유교가 전래해 왔었고, 특히 통일 신라 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 유학을 다녀왔으므로 시를 짓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운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쌍기(雙冀)의 건의로 고려 광종 때에는 958년(광종 9)부터 시부송(詩賦頌)과 시무책(時務策)으로 과거를 실시했다고 하니, 운서는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고려 시대에 정초(鄭樵)의 『통지(通志)』와 그 안에 수록되어 있는 '칠음략'과 같은 운도, 중국 36자모표가 실려 있는 왕응린(王應麟, 1223∼1296)이 지은 『옥해(玉海)』, 107운 계통의 『임자신간예부운략』(1252)을 이은 『고금운회거요』(1297)와 106운 계통의 『평수신간운략』(1229), 그리고 자서(字書)인 『용감수경(龍龕手鏡)』(997)과 운 중심으로 편찬된 음시부(陰時夫)의 『운부군옥』(역시 106운) 등이 전래되었음을 알 뿐이다.

 

106운 계통의 운서는 시인들이 시를 짓거나 글을 지을 때의 기준이 되어, 앞에서 언급한 대로 '평수운' 또는 '시운'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여러 사람에게 애용되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도 106운 계통의 『예부운략』이 1463년(세조 9)부터 『신간배자예부운략』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복각되어 간행되었다.

 

원래 중국에서 『예부운략』은 1008년(송 진종 대중상부 1)에 간행된 『광운』을 구옹(邱雍)과 척륜(戚綸) 등이 『광운』 수록자 24,194자를 9,590자로 줄여서 과거 응시용으로 개편한 것이다. 이것을 모황(毛晃)이 1162년(남송 고종 소흥 32)에 2,655자를 보태서 12,000여자가 수록된 『증수 호주 예부운략(增修 互註 禮部韻略)』을 간행했다.

 

또한 조선 초 시기에는 명나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명나라 태조가 편찬시킨 『홍무정운(洪武正韻)』(1375)도 전래되었을 것이다.

 

3. 세종의 한자음 정리 계획과 신숙주

 

위에서 기술한 경로를 거쳐서 이 땅에 운서 등 중국 음운학에 관련된 학문이 전래되자, 학문을 좋아했던 세종은 이에 관심을 가지어 중국 음운학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이러한 사실은 『동국정운』(1447) 서문, 『홍무정운역훈』(1455) 서문 등에 나타나 있다. 세종은 이와 같은 학문적 소양이 쌓이자 전승 한국 한자음과 한어의 자음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 이들에 대한 정리 사업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계획을 수립해도 성실한 보필자가 없이는 그 실행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세종에게는 다행히도 집현전에서 학문의 길을 닦은 신숙주, 성삼문, 최항과 같은 뛰어난 어학자들의 보필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어학자가 신숙주였으며, 그는 세종이 계획한 한자음 관계 사업에 하나도 빠짐없이 참여했었다.

 

(1) 신숙주의 한어(漢語) 습득

 

신숙주는 22세 때인 1438년(세종 20)에 새로 시와 부(賦)를 시험 과목으로 한 진사 시험에 장원을 하고 같은 해 생원 시험에도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서 다음 해 을과 3등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전농직장(典農直長)을 제수 받았으나, 다음 해 24세 때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독서에만 전념했다. 따라서 신숙주가 한어를 학습했다면 이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한학강이관(漢學講肄官) 제도다. 조선에서는 이웃 나라들의 언어를 교육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1393년(태조 2) 9월에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하여 한학(한어), 몽학(몽골어), 여진학(여진어), 왜학(일본어)을 교육하고 장려하였다. 1394년(태조 3)에는 한어 학습을 장려하기 위하여 서울 안의 5부와 지방 관청에 명령하여 15세 이하의 양가(良家) 자제 가운데 슬기로운 사람들을 뽑아서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또 한어를 더욱 효과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하여, 사역원에서 일단 교육시키고 중국에 가는 사신들의 종사관으로 딸려 보냈다.

 

이 제도는 1433년(세종 15) 12월부터 실시되었으며, 유직자(有職者)는 '한학강이관'이라 부르고 무직자는 '한학생'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양가 자제 가운데에서 영예롭게 뽑힌 사람들이었으며 '강이관'은 문신 출신이었다.

 

따라서 신숙주가 과거에 합격한 이후에 한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면, 과거에 응시하기 이전에 사역원의 '한학생'과 같은 제도를 통해서 한어를 학습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에 실려 있는 '연보'의 '병인 공 30세' 항 협주(夾註)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公旣早年學華語于上國(공이 이미 젊을 때 중국에서 한어를 배웠다)". 이 구절의 앞뒤에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신숙주가 한어를 배운 경위를 알 수 없으나, '早年'이라고 하였으므로, 한어를 일찍 배운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와는 별도로 세종 시대에 가장 중용되었던 성리대전(性理大全)과 앞에서 열거한 중국 운서 등을 통하여 중국 음운학에 관한 지식도 섭취하였을 것이다.

 

(2) 신숙주의 한어 실력

 

세종은 1443년에 한글을 창제한 이후 곧 명나라 태조가 편찬시킨 『홍무정운』(1375)의 수록자(收錄字)에, 한글로 한어의 자음(字音)을 주음(注音)시키려고 했었다. 그래서 때마침 요동(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 황찬(黃瓚)에게 성삼문과 함께 신숙주가 찾아가도록 했다. 그 때 신숙주는 황찬의 물음에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하니 신숙주의 한어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해에도 신숙주와 성삼문은, 한 해에 세 번씩 열 세 번(또는 여덟 번)이나 요동에 다녀왔다고 한다.

 

또 1450년(세종 32) 초에 명나라 사신 한림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과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詢)이 조선에 오자 접대를 담당하고, 이들과 시(漢詩)를 주고 받으면서 『홍무정운』에 대해서도 질정(質正)하였다.

 

『보한재집』 부록에 실려 있는 강희맹의 '문충공행장'에는 "공(신숙주)이 한어 왜어 몽고어 여진어 등에 모두 통하여 때로는 역관에 의지하지 않고도 뜻을 통할 수 있었다."라 하고, 또 "공이 손수 여러 나라 언어를 번역하여 나라에 바치어 역관들이 스승의 가르침이 없이도 이들 언어를 밝게 깨우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 언어'를 신숙주가 어떻게 손수 번역하여 어떤 업적을 나라에 바쳤는지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이 행장으로 보아서는 신숙주의 외국어 실력이 대단하였던 것 같다.

 

(3) 신숙주와 운서

 

이제 신숙주가 참여한 운서 관련 사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에 대한 한글 주음(注音) 사업

 

1443년(세종 25) 12월에 표음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첫 사업으로서 이 새 글자를 가지고 『고금운회거요』에 대하여 주음하도록 명하였다.

 

1444년(세종 26) 2월 16일(丙申) 날짜의 『세종실록』 기사에는 세종이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동 이선로, 동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의사청(議事廳)에서 한글로 『운회』를 '번역'하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운회』는 1292년에 원나라 황공소(黃公紹)가 지은 『고금운회』가 아니고 1297년에 웅충(熊忠)이 간략화한 『고금운회거요』일 것이다. 왜냐하면 『고금운회』는 곧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은 1443년에 한글을 창제하자마자 한어를 학습하려면 한어 자음(字音)을 한글로 기록하여 한어음을 익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음의 발음 사전인 운서 안의 한자들의 음을 한글로 기록하게 하였다. 그 대상으로 설정된 운서가 그 무렵에 조선에서 널리 쓰이던 『고금운회거요』였다.

 

이 운서에 대한 한글 주음 사업에는 세종실록의 기사대로 신숙주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완성되었다는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업은 중단되었던 것 같다. 그 대신 세종은 이 운서의 체계를 기준으로 해서 그 시절까지 전해오고 있던 한국 한자음, 곧 전승(傳承) 한자음을 규범화하기 위하여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시켰다.

 

② 『동국정운』 편찬과 신숙주

이 사업은 전승 한자음을 체계화하여 표준 한국 한자음을 설정하려는 목적 아래 세종이 진행시킨 것이다.

 

이 사업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고금운회거요』에 대한 한글 주음 사업이 중단된 뒤를 이어서 진행된 것 같다. 이 사업에 참여한 학자들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집필한 진영과 거의 같아서, 신숙주를 비롯하여 수집현전 직제학 최항, 수직집현전 성삼문, 동 박팽년, 수집현전 교리 이개, 수이조정랑 강희안, 수병조정랑 이현로 등과 수승문원 교리 조변안, 승문원 부교리 김증이었다.

 

이 사업은 1447년(세종 29) 9월에 6권으로 편찬 완료되고 1448년(세종 30) 10월에 출판되었다. 이 책이 완성될 때 신숙주가 31세의 몸으로 서문까지 쓴 것을 보면 그가 이 편찬 사업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정운』 편찬자들을 대표하여 신숙주는 '동국정운 서문'(1447)에서 15세기 한국 한자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먼저 지리적 조건과 발음이 달라 한자음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여러 예를 들었다.

 

1) 아음(牙音)에서는 k'-(溪母) 음으로 발음되던 자음들의 태반이 k-(見母)로 발음되고 있다.

2) k'-음으로 발음되던 자음들 가운데 h-(曉母)음으로 발음되고 있는 것들이 있다.

3) 우리말의 어음에서는 청 탁의 구별이 중국과 다름이 없는데도, 한국 한자음에만 탁성이 없다.

4) 우리말의 어음에서는 4성조의 구별이 매우 분명한데, 한국 한자음에서는 상성과 거성의 구별이 없고, -t(端母) 음으로 종성을 삼아야 할 운을 -l(來母)음으로 종성을 삼고 있다.

5) 우리말에서는 k'-음을 초성으로 많이 쓰고 있는데, 한국 한자음에서는 ' (쾌)'자 하나만 초성에서 k'-음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동국정운』 편찬을 맡았던 신숙주 등은, 위의 예들을 한국 한자음의 특징으로 생각하지 않고, 중국 본토의 자음 체계에서 벗어난 '와(訛)'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한국 한자음 체계를 하루라도 빨리 바로잡지 않는다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동국정운』의 편찬 방향은 전승 한국 한자음을 바탕으로 하여, 『동국정운』 초성 체계를 훈민정음 초성 체계와 마찬가지인 23초성(성모) 체계로 정리하되, 위에서 예로 든 한국 한자음의 일부를 중국의 운서음 체계에 맞도록 환원시키는 쪽으로 잡았다.

 

다시 한자음을 소리의 높낮이에 따라 평 상 거 입 4성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운모음의 차이에 따라 91운으로 정리하였다. 91운은 1444년(세종 26)에 한글로 주음을 시도했던 『고금운회거요』의 「자모운(字母韻)」(13세기 한어 자음의 현실음) 체계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세종은 『동국정운』 편찬이 완료되자 이 운서에서 제시한 한자음을, 한국 한자음의 표준으로 정하고, 모든 간행물 안의 한자에 이 운서의 음을 기록하게 하였다.

 

③ 『홍무정운역훈』 편찬 사업에 참여

 

세종은 15세기 전승 한국 한자음의 표준음으로 『동국정운』을 편찬시키면서 중국 본토의 표준 자음(標準字音), 곧 한음(漢音)을 익혀서, 한어(漢語) 학습의 길잡이로 삼고자 중국 운서에 대한 한글 주음을 계획했다. 그래서 그 첫 번째 주음 대상으로 선택된 운서가 『고금운회거요』였으나, 이 운서에 대한 주음 사업은 중단되고 그 대신 선정된 것이 『홍무정운』이었다.

 

이 책은 명나라 태조가 편찬시킨 것이다. 명나라는 이민족(異民族)이 지배하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새 제국을 건설하자 언어의 통일을 위하여 건국 초기인 1375년(홍무 8)에 악소봉(樂韶鳳) 등 여러 학자들이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세종은 명나라 황제가 편찬시킨 『홍무정운』을 가지고 한어의 자음(字音)을 학습하면 가장 정확한 한어음(漢語音)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신숙주는 1455년(단종 3) 2월에 이 사업이 완성되었을 때 서문을 쓸 정도로 이 일에서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이 사업에는 성삼문, 조변안(曹 安), 김증(金曾), 손수산(孫壽山) 등이 편찬에 참여하고, 노참(魯參), 귄인(權引), 임원순(任元濬)이 교정을 하였으며, 동궁(문종), 수양대군, 계양군 증(桂陽君 璔)도 이 일에 관여하였다. 1455년 2월에 사업이 10권으로 완성되었을 때 책이름은 『홍무정운역훈』이었다. 이 책의 편찬 목적에 대하여 신숙주는 『홍무정운역훈』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종대왕께서 운학에 뜻을 두고 깊이 연구하시어 훈민정음 약간 자를 창제하신 다음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하는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하므로 맨 먼저 『홍무정운』을 번역(주음)하도록 명하시었다.

 

그리고 『홍무정운』이 얼마나 중요한 운서인가 하는 것을 역시 「서문」에서 지적하였다.

 

성운학(곧 중국 음운학)은 깨우치기 어려운 학문이다. 대개 사방의 풍토가 같지 않으면 이에 따라 사람의 발음도 다르게 마련이다. 성조(4성)와 성(聲) 운(韻)이 지역에 따라서 다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한음에 여러 음이 섞이게 되었는데, 이를 식자들이 걱정해 왔으나 역사상 아직 이를 바로잡은 이가 없었다. 그런데 명나라 태조 고황제께서 한음이 어지럽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기어 여러 학자들에게 중원 아음(중국 북방 공통음)을 기준으로 해서 『홍무정운』을 정하라고 했으니 이 『홍무정운』은 천하의 만국이 받들 기준이다.

 

이와 같이 『홍무정운』에서 제시된 음을 '천하 공통의 음'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세종도 『홍무정운』의 음계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중국의 표준 자음(字音)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운서에 수록되어 있는 글자(한자)의 음을 한글로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이 운서는 황제가 편찬시킨 운서였으나, 운모 면에서는 북방음과 비슷하였으면서도 성모 면에서는 전탁음을 보존시키고 운미에서 입성을 보존시켜서 현실음과 부합되지 않는 면도 있었다. 이것은 이 운서를 편찬한 사람들이 대부분 남방 사람들이었고, 이 운서를 편찬하던 1375년 경의 명나라 수도가 아직 남경(南京)이었던 데도 원인이 있었다(1368년에 명나라 건국, 제3대 성조 때인 1421년에 북경으로 옮김).

 

『홍무정운』에 대한 한글 주음 사업을 맡았던 신숙주와 다른 학자들은 15세기의 중국 북방음을 알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반절로 표시되어 있는 『홍무정운』의 음계도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어긋나는 음계를 그대로 주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숙주 등은 중국의 자음(字音)을 더 확실히 알아보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1) 신숙주는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여러 번 찾아가서 한음을 물어보았다.

2) 명나라 수도인 연도(燕都,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 여러 음을 알아 보았다.

3) 또 명나라 사신이 오면, 정확한 음을 알아보았다.

 

신숙주 등이 『홍무정운역훈』을 완성하는 데 이렇게까지 고심한 것은 신숙주 등이 파악하고 있었던 중국 북방의 한음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1) 중국의 전통적인 36자모 가운데서 설상음 4모와 순경음 차청음 l모가 이미 안 쓰이고

2) 전탁자의 평성은 차청음과 가깝게 쓰이고 상성 거성 입성은 전청음과 가깝게 쓰이며

3) 일반 사람들은 입성 운미를 쓰지 않고 있었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음계를 알고 있었던 신숙주 등은, 『홍무정운』의 수록자, 글자의 순서, 음을 나타낸 반절, 수록자에 대한 뜻풀이 등을 거의 그대로 두고서, 각 소운(小韻)의 대표자 앞에 그 소운 대표자의 성모음을 31 자모로 표시하였다. 그러고서 그 자모와 소운 대표자 사이에 그 소운의 자음(字音)을 한글로 기록하였으며, 때로는 소운 대표자의 음을 나타낸 반절 다음에 15세기의 실지 북방음을 속음(俗音)이라 해서 표시하고, 달리 발음되는 음도 표시했다. 또한 때로는 간단히 주석을 덧붙이기도 해서, 16권 8책으로 이루어진 『홍무정운역훈』을 1455년(단종 3년, 경태 6) 2월에 편찬 완료하였다.

 

④ 『사성통고(四聲通攷)』

 

『사성통고』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1517년(중종 12)에 이루어진 『사성통해(四聲通解)』의 서문에서 최세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종 대왕께서는 『홍무정운역훈』을 편찬시켰으나 16권으로 된 이 책이 완성되자 그 분량이 너무 많아서 읽는 사람이 어려워할 것을 염려하시었다. 그래서 신숙주에게 자음(字音) 위주로 책을 편찬하도록 명하고, 책 이름을 『사성통고』라고 내려 주셨다.

 

그리고 같은 '서문'에 의하면, 『사성통고』는 같은 운에 속하는 한자들을 자모 순에 따라 배열한 뒤 한글로 각 소운 대표 글자의 음을 표기했다고 한다. 『사성통고』는 같은 소운에 속하는 한자들을 평성 상성 거성 입성으로 분류하여 배열한 책이었다. 즉 『홍무정운역훈』의 반절과 글자 뜻풀이를 생략하고 순전히 자음(字音)의 정음과 속음만을 간추려서 '홍무정운 31자모' 순으로 한자음들을 배열하고 『홍무정운역훈』에 수록된 한자의 음만을 알 수 있게 만든 책이었다. 『홍무정운』은 평성부터 시작하여 상성 거성 입성 순으로 나누어서 배열하고, 각 성조 별로 수록된 소운의 배열로 31자모 순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성통고』는 다른 운서들과는 달리 신숙주 혼자서 편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그 범례에서는 『홍무정운역훈』 편찬 방침과 '홍무정운역훈 편찬자' 들이 관찰한 중국 본토 자음의 정음 및 속음의 실태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중국 북방음에서 쓰이고 있는 성모와 그 변화, 입성 운미의 소실(消失), 15세기 중세 국어와 한어 중성과의 차이 등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근대음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증언이다.

 

또 범례 제7조에서는 15세기 중세 국어의 모음을 장구지자(張口之字) ㅏ ㅑ ㅓ ㅕ와 축구지자(縮口之字) ㅗ ㅛ ㅜ ㅠ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이러한 훈민정음 중성 글자의 순서는 애당초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ㅡ ㅣ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라고 하던 것이 바뀐 것으로서, 1527년(중종 22)에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 범례에서는 '언문자모 속소위반절(諺文字母 俗所謂反切) 27자'라고 해서 훈민정음 중성 글자의 순서를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했다. 이러한 중성 글자의 순서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신숙주는 이와 같이 운서 관계 사업을 27세 때인 1443년(세종 25)부터 39세 때인 1455(단종 3)까지 10여 년 동안 수행하여 한국 한자음의 규범화, 표준 중국 본토 자음 제시 등에 큰 공적을 남겼다.


출처 :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신숙주와 운서",『새국어생활』제12권 3호(2002년 가을, 국립국어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