交河盧氏

교하노씨

착한 인생 2019. 10. 24. 09:44

[노씨들의 분파]


  주 나라 건국 공신인 강태공 후손의 증손자 고혜가 노현에 봉해진 것에 비롯되었다.

 시조는 노수이며 본관은 문헌상으로 137개가 전해지나 광산·교하·풍천·장연·안동·안강·연일·평양·곡산 등 9개의 본관을 대표로 한다.

 

우리나라 노씨의 도시조는 수(穗)이다. 그는 중국 범양 사람으로 당나라의 한림학사를 지냈는데 안록산의 난을 피해 9명의 아들을 데리고 신라로 건너와서 우리나라 노씨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아들 아홉은 모두 국가에 공을 세워 고려 초기에 각각 봉군되어 득관조가 되었다.

아들 해(垓)는 광산노씨의 득관조이다그가 광산백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득관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의 이어짐이 확실하지 않아 고려 때 정승을 지내고 광주군에 봉해진 만(蔓)을 중시조로 하는 계통과 대호군 서(恕)를 중시조로 하는 계통으로 갈리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해의 후손인 시헌이 조선시대에 해주로 옮겨와 살았는데 그를 중시조로 하여 해주노씨가 분리되었다. 수(穗)의 아들 오(塢)는 교하백에 봉해졌으므로 교하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오의 후손인 강필이 본관을 장산으로 했다가 고려의 개국 공신이 되어 선성부원군에 봉해져 다시 교하로 복관했다. 이에 따라 강필을 중시조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강필의 후손인 지유를 중시조로 하여 신창노씨가 분리되었다. 아들 지(址)는 풍천백으로 봉해졌으므로 풍천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러나 후손의 이어짐이 확실하지 않아 고려 때 국자진사를 지내고 풍천에 세거한 유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아들 구(坵)는 장연백에 봉해졌으므로 장연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아들 만은 안동백에 봉해졌으므로 안동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러나 후손이 이어짐이 확실하지 않아 고려 시기에 이부 상서를 지내고 평장사에 오른 우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아들 곤(坤)은 안강백에 봉해졌으므로 안강(경주)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의 이어짐이 확실하지 않아 첨정을 지낸 종선과 목사를 지낸 희선을 중시조로 하는 계통으로 갈리어 내려오고 있다

 

아들 증은 연일백에 봉해져 연일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의 이어짐이 확실하지 않아 경령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아들 판은 평양백에 봉해졌으므로 평양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인 극청이 고려 때 만경군에 봉해졌으므로 만경노씨가 분리되었다. 아들 원은 곡산백에 봉해졌으므로 곡산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 때 관직을 역임한 조(兆)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이중 광주·교하·풍천 3개 본관이 전체 노씨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6만 8,776호와 인구수 22만 354,

2015년 에는 256,238명으로 조사되었고 한국 성씨 인구 순위 33위를 차지했다. 

 

 

[교하노씨]

 

[정의]

노오를 시조로 하고 노정직을 입향조로 하는 창원시 세거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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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교하는 경기도에 속한 곳으로, 1914년 파주군에 통합되어 현재 경기도 파주시가 되었다.

  

[연원]

교하 노씨의 시조는 노수(盧穗)의 아들 노오(盧塢)이다. 노씨의 시조는 노수인데, 그는 중국 범양(范陽) 출신으로 당나라 한림 학사를 지낸 사람이다. 877(신라 헌강왕 3)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아들 아홉 형제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이주하였다. 노수의 아들 대에 이르러 각각 교하(交河), 풍천(豊川), 안동(安東) 9본으로 관향을 정하고 분파하였다. 교하 노씨는 둘째 아들 노오가 교하백(交河佰)으로 봉백됨으로써 탄생하게 되었다.

 

노오의 후손인 노강필(盧康弼)은 교하 노씨의 일세조(一世祖)이다. 노강필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그를 도와 개국 공신이 되어 광록대부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太子太師)에 올랐으며 선성 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교하 노씨는 10세손 노책의 아들 대에서 4파로 갈리어 크게 번성하기 시작한다. 큰아들 노제가 시중을 지내고 서원군에 봉해져서 서원 군파로, 둘째 노진이 공민왕조에 창성 군파로, 셋째 노균(盧鈞)이 경원군에 봉해져서 경원 군파로, 넷째 노영(盧渶)이 신양군에 봉해져서 신양 군파로 갈린다.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은 노진의 손자이고, 연산군 대에 영의정으로 무오사화 때 많은 사림을 구출한 문광공(文匡公) 노사신(盧思愼)은 노한의 손자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초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노경종(盧景宗)이 이름을 떨쳤는데, 창원에 돌아와서도 소모장(召募將) 이정(李瀞)의 참모가 되어 공을 세운 뒤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정유 재란 때도 많은 왜적을 베어 훈련원정에 제수되었으며, 나중에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는 시문(詩文)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11세에 이미 망정 병산(望精兵山)을 지었고, 등월영대(登月影臺)등 많은 시를 남겼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적성 현감을 지낸 노형 또한 이 집안을 빛낸 사람으로 기록된다.

  

[입향 경위]

교하 노씨의 입향조는 창원 명곡으로 이거한 조선 시대 홍문관 교리를 지낸 노정직(盧廷直)으로, 이후 이를 교하 노씨 교리공파(敎理公派)라 한다. 교리공파는 서원군파에 속하는데, 노정직이 교하 노씨 서원군파 서원군의 6세손이기 때문이다. 족보에 는 단종 복위로 인한 시국의 어수선함을 피해 낙향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현황]

옛 창원군 상남면 명곡리 일대에 세거했던 교하 노씨는 이후 명곡 외에 서곡(西谷지귀(知歸봉림(鳳林) 등으로 퍼져 살게 되었다. 이들 마을은 1980년 이후 창원시의 도시 계획에 따라 인근 지역으로 이거하게 되는데, 오늘날 명서동·봉림동 등에 여전히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창원 군지에는 허전(許傳)[1797~1886]이 지은 첨지중추부사 노경종묘갈명(僉知中樞府使盧景宗墓碣銘)’이 실려 있다. 홍문 교리 공묘표에는 정통(正統) 9(1444) 12월 명곡 감산 언덕에 안장했다. 함안 조씨에 장가들어 23녀를 두었다. 아버지는 사복시 정 노사충(盧思忠)이요, 할아버지는 중현 대부 선공령 노영(盧永), 증조는 봉익대부 예의 총랑 노천허(盧天許)이다. 외조는 정순대부 판군기시 박문본이니 본관이 울산이다. 아내는 조씨이니 봉훈랑 영산 현감 조길화의 딸로 본관은 함안이다.”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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