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에 대하여
읽고 난 필요 없는 책들 정리해서
도망 못 가게 노끈으로 사지를 단단히 묶어서
가져가는 사람 있다기에 대문 옆에 내놨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엄동설한에 쫓겨난 자식처럼 덜덜 떨고 있는
것이 보기 안쓰러워 다시 창고에 들여놓고서,
헌책 버릴 걱정 안하고 고무다라이나 엿 바꿔먹던
옛날이 좋았다고 생각해 보는 건데, 옛날처럼 화장실
변기통 옆에 매달아 놓고서 화장지로 한번 사용해볼까
애들 컴퓨터게임 못하게 하고 운동도 할 겸 딱지 접어서
가지고 놀라고 윽박질러 볼까, 올봄에는 집수리도 해야
하는데 비싼 도배지 사지 말고 책으로 도배를 해버려
별 쓸데없는 궁리를 다 해 보기도 하는 것인데,
헌 교과서 찢어서 골연초 말아 물고 불쏘시게 해서
군불 지피던, 까막눈 할매 하시던 말씀
니들 책값은 하나도 아깝지 않어야, 나중에 그게 다
살림밑천잉께
책 주인의 고민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맘대로 가져가라고 내놓아도 반응이 없다. 상품으로 넘쳐나는 풍요의 세상에서 휴지 취급조차 못 받는 헌책의 처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인의 귓가에 환청처럼 들려온 할머니의 목소리. 형제들 숫자대로 교복처럼 물려가며 사용되다 마침내 긴 여정을 마친 단 한 벌의 국정교과서는 생의 종착지 부뚜막에서 남은 소임을 다했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턴가 내게도 이사할 때면 책이 늘 문제다. 퇴출과 잔류 사이를 고민한 끝에 ‘책 옮기는 게 제일 힘들다’는 이삿짐센터의 푸념을 한 번 더 듣는 쪽을 택하고 만다. 함께했던 시간의 기억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다.
조선 영정조 때 실학자이자 대문장가인 이덕무(1741∼1793)는 스스로를 ‘책만 아는 바보(간서치·看書癡)’라 불렀다. 그는 서얼 출신이란 신분 제약 때문에 끼니를 걱정할 만큼 궁핍한 형편 속에서도 오직 책 보는 낙으로 살았다. 책 살 돈이 없어 친구에게 빌린 책을 골방에 앉아 아침엔 동쪽, 저녁엔 서쪽 창가로 햇살을 따라가며 읽었다. 그렇게 평생 2만 권 넘는 책을 읽고 직접 필사한 책만 수백 권이었다 한다. 그에게 책은, 활자가 박힌 종이묶음이 아니라 온기가 흐르는 생명체이자 정겨운 벗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디지털로 유통되는 시대. 아날로그의 대명사인 종이책의 종말도 수시로 거론되지만 책장 넘길 때의 소리와 촉감, 책의 향기를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모니터가 얼마만큼 대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책은 대개 헌책이다. 신생아 외에 사람을 대개 새것이라 하기 힘든 것처럼. 새것 헌것을 자꾸 구분 짓는 습성도 혹시 ‘신상’의 은총에 짓눌린 ‘신인류’의 환각은 아닐까. 끝없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그러지 않고서는 불안한.
고미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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