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글과 시에 관한 이야기/나만의 글

오삼계(吳三桂)는 역적인가? 영웅인가?

착한 인생 2018. 12. 30. 18:44

    



오삼계(吳三桂)는 역적인가? 영웅인가?




‘오삼계(吳三桂)’는


중국,
 아니?
한족(漢族)의 明나라에게는 

역적이었을까?
아니면 영웅이었을까?

여진족(女眞族)의  淸나라는

 忠臣으로?
 아님 역적으로 취급했을까?

그러나 영웅은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역적으로. 
두 나라에겐 모두.

명나라 말기에 이자성과 내분의 중심에 서있던 오삼계가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문으로서 군사적 요충지였던
산해관(山海關)에서
구원을 빌미로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끌어들여
 明나라의 명맥(命脈) 끊어 놓았고,

 또 
남명(南明) 정권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永历帝)가
청나라 군에 쫓겨 멀리 운남까지 도망치자,
끝까지 쫓아가서  끝내 그를 살해한 자가 오삼계였다. 

 이러하니
오삼계는
한족(漢族)의 明나라에게 있어서는
분명 씻을 수 없는 매국노(賣國奴)요
,
 반면에
淸나라에게는 공신(功臣)이었을 것이다.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오삼계의 특사가
말에 채찍을 가하여 심양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옹후(翁後, 요령성 광녕 부근)에서 공교롭게도 예친왕의 행렬과 마주쳤다.
오삼계의 특사는 예친왕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바쳤다.
예친왕은 너무나도 뜻밖의 일에 자못 가슴이 설렐 지경이었다.
그는 애써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마음속으로 말하였다.


“산해관은 난공불락의 명나라 요새이다.
일찍이 태종 홍타시도 정면 공격을 피했던 금성탕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는 산해관을 지키는 명나라 군대의 안내를 받으며
산해관을 넘게 되었으니
 정녕
하늘이 우리 청나라를 도움이로다!.”

예친왕은 오삼계의 특사에게 지원 의사를 흔쾌히 밝히고 산해관을 향해

진군하였다<Daum백과: 산해관과 오삼계 – 이야기 중국사3, 김희영, 청아출판사>‘

 

 

오삼계가 淸나라울 끌어들여 明나라를 멸망시킨 공으로
남쪽 운남지방의 “평서친왕‘으로까지 봉해졌으나
 ’삼번의 난(三藩之亂)‘을 일으키다가
끝내 淸에게 토벌되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다.

 淸에게 반역의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오삼계는 明 · 淸  모두에게 역적이 되고만 셈이다.



그러면
   明 · 淸 이 한데 어우러진  오늘날의 중국의 입장에서
 오삼계를 어찌 보아야 할까?
 중국 건국의 한 인물로 잡아주어도 괜찮으리.
물론 여진족의 후손에게는 불행(不幸)한 일이긴 하지만서도

지금의 중국은
 한족, 여진족을 포함한 50여개의 소수민족이 결합된 나라이다.



오삼계가 내분이 아닌 화합으로
한족(漢族)의 明을 위해 싸웠더라면
50만 대군을 갖고 있던 오삼계와
 이자성의 수십만 군대가
분명 淸을 이길지는 모른다는
가정(假定)은
없지만

 淸
또한
明을
멸망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假定)
또한
 있을 수 없다.


이후의
역사는
만주족(여진족)의 근간인 북동지방 만주국과
한족(漢族) 및 소수민족의 중국으로
할거되어
흘러갔을 지도 모른다.
라는
관점하에서
지금의 중국은 탄생할 수 없었다.
라는
가정까지 만들 수 있다면

분명
오삼계는 중국 건국의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아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이러니컬한 주장을 담아본다.

 반면에
만주국인 淸에게는 적극적인 대항으로
明을 삼키지 못하게 오삼계가 저항을 했더라면
지금의 중국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자신들은 淸國(또는 滿洲國)이라는 국호로
동북부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존속되어오지 않았을까?


지나간 역사는 바꿀 수 없지만
중국내의 滿洲族(만주족 :여진족, 조선족)에게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고,

한족(漢族)은
중국 북동부지방(옛 淸의 본국)까지 영역을 확대해
동아시아의 , 아니? 지구상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으니
오삼계를
 영웅으로 숭배해야 하지 않을까?

어디엔가도
 매국노라는 호칭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을 알아서였을까?

중국!
 한마디로 웃기는 나라와 역사이다.

예전부터
그런 줄 알고 있지만.


오삼계(吳三桂, 1612년 ~ 1678년)는 명말청초 장수이다. 자는 월소(月所)와 장백(長白)이며, 명 말기에 청에 투항하여 청군에 협력한 공으로 번왕에 봉해졌다. 강희제가 번을 폐하려고 하자 0광동의 상지신, 복건의 경정충 등과 함께 거병, 반란을 일으켰다.(삼번의 난)

           <2018.10.12 孤松<눈솔외> 筆>

 

 

 

  ☞ 한국일보<이 글을 미리 보았더라면 윗 글은 쓰지 못했을 것>

 [지평선] 악비와 오삼계

입력 2006.09.11. 18:35수정 2006.09.11. 18:35댓글 1

요즘 중국의 역사 왜곡 보도를 접하면서 악비와 오삼계라는 인물이 새삼 떠오른다. 악비(岳飛1103~1141)는 송나라 때 금나라와 싸운 구국의 영웅이자 만고의 충신이다. 항저우에 있는 악비묘와 충렬사에는 지금도 중국인들의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사당 안의 좌상은 높이가 4.5m나 되고 화려한 보라색 비단옷으로 장식돼 있다.

그런데 이 악비가 몇 년 전부터 중국 당국에 의해 '그냥 훌륭한 장군'으로 격하되고 있다. "송도 금도 다 중국의 일부인데, 형제끼리 싸운 것을 가지고 민족과 구국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금은 여진족의 나라다. 그 후예가 만주족으로, 후일 송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나라였던 명을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운다. 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오삼계(吳三桂1612~1678)였다. 그는 요동 방어를 팽개치고 청군의 베이징 진격에 앞장서고 그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래서 만고의 역적이고 중국사 10대 간신에 낄 정도다. 그러나 현재 중국 영토 내의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논리로 하면 오삼계는 현대 중국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만주(현재의 동북3)에서 출발한 청은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한족의 중원, 내몽골, 티베트, 위구르, 타이완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현재의 중국은 바로 청의 영토를 그대로 차지한 것이다. 그러니 현대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쑨원은 쑥스럽게 됐다.

20세기 초 혁명운동을 하면서 국민당 강령, 그것도 제 1조로 멸만흥한(滅滿興漢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무지의 소치이거나 소아병적 한족 중심주의의 발로이다. 왜냐? 만주족이야말로 한족을 포함해 56개 민족으로 구성됐다는'중화민족'이 지금과 같은'대가정'을 이루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500여 년의 세월을 격해 살았던 악비와 오삼계가 만난다면 이런 얘기를 나눌 것 같다. '악비:오삼계, 네 이 놈, 어찌 나라와 민족을 오랑캐에게 팔아먹을 수 있단 말이냐? 오삼계:장군님,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간신들한테 역적 누명까지 쓰고 돌아가셨지만 후손들 대접이 영 썰렁하단 얘기 들었습니다.

금나라와 싸운 건 내전이라니까요. 저는 이제 좀 좋은 대접 받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오랑캐를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청이 섰겠습니까? 그럼 중화민족도 없고, 영토도 명나라 때 그대로 지금의 절반에 불과할 겁니다. 그러니 중화인민공화국의 으뜸 공신이지요. 세상 돌고 도는 겁니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