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를 싣고 여행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인생역정을 표현한 김수자 씨의 영상작품. 국제갤러리 제공
잘못 든 길이 나를 빛나게 했었다 모래시계는
지친 오후의 풍광을 따라 조용히 고개 떨구었지만
어렵고 아득해질 때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마저 가야할 어떤 약속이 지친 일생을 부둥켜 안으리라
생각했었다 마치 서럽고 힘들었던 군복무 시절
제대만 하면 세상을 제패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내 욕망의 신록이 지금 때절어 쓸쓸한데
길 잘못 들수록 오히려 무모하게 빛났던 들끓음도
그만 한풀 꺾였는가,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저기 또 한 고비 신기루처럼 흔들리는 구릉이여
이제는 눈 앞의 고비보다 그 다음 줄줄이 늘어선
안 보이는 산맥도 가늠할 만큼은 나이 들었기에
내내 웃목이고 냉골인 마음 더욱 시려오누나
따숩게 덥혀야 할 장작 하나 없이 어떻게
저 북풍 뚫고 지나려느냐, 길이 막히면 길을 버리라고
어차피 잘못 든 길 아니더냐고 세상의 현자들이
혀를 빼물지만 나를 끌고가는 건 무슨 아집이 아니다
한때 명도와 채도 가장 높게 빛났던 잘못 든 길
더 이상 나를 철들게 하지 않겠지만
갈 데까지 가보려거든 잠시 눈물로 마음 덥혀도
누가 흉보지 않을 것이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 강연호 ‘비단길 2’
트럭에 가득 실린 보따리 위로 등 돌리고 앉은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보따리 작가’로 불리는 김수자 씨다. 그는 1997년 11일 동안 보따리를 짐칸에 싣고 유년시절 살던 곳을 찾아가는 이동의 여정을 기록한 비디오 작품 ‘움직이는 도시: 보따리 트럭 2727km’를 발표한다. 2007년 프랑스 파리에서도 같은 퍼포먼스를 펼쳤다. 화물차에 몸을 맡긴 채 중국 인도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모여드는 동네를 돌면서 낯선 땅으로 흘러온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 것이다. 그의 퍼포먼스가 널리 알려지면서 ‘보따리’(Bottari)는 그대로 해외 미술계에서 통하는 우리말이 됐다.
예술가, 혹은 사막을 건너 비단길을 오갔던 대상(隊商)이 아니라도 유랑의 삶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는 각기 할당받은 희로애락의 보따리를 이고 진 채 날마다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타박타박 걸어가는 나그네들이다. 그 길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어디쯤이나 왔는지 위치 정보를 파악하고 적절한 때 경로를 수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강연호 시인의 ‘비단길 2’는 그렇게 정처 없는 순례길이 차츰 두려워질 때, 자기 체중을 웃도는 등짐 무게에 무릎이 후들거릴 때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길 없는 길을 헤매고 길을 잘못 들 때 삶의 지도가 만들어진다고 위로를 건넨다.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에 패한 영국 축구대표팀의 스튜어트 피어스 감독은 인터뷰에서 시인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이번 시련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대니얼 스터리지 선수를 지목한 얘기였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준결승에서 맞붙은 옛 서독과의 승부차기에서 실패한 자기 체험에서 우러나온 증언이란 점에서 울림이 묵직하다.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메달리스트의 그늘에 가려 소외된 국가대표 선수들을 생각하며 시를 읽는다. 지금은 기대했던 여정에서 벗어나 좌절할지 몰라도 바로 거기서 지도가 탄생할 것을 믿는다. 멈추지 않고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한, 길은 빛나는 미래로 다시 이어진다.
고미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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