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글과 시에 관한 이야기/빌려온 글과 시의 이야기

' 별 ' - 2018 -12 -31

착한 인생 2018. 12. 30. 19:00


       별 
- 정진규(1939~)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강찬모 씨의 ‘달빛 사랑’.

대한민국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감추고 싶은 비밀 1위는 무엇일까.

퇴근 길 버스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답은 뜻밖에 ‘비자금’이 아닌 ‘외로움’이란다. 남자만 그럴까.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선 여주인공의 독설이 쓸쓸함을 표현하는 몸부림이란 사실을 곱씹게 한다. 일상의 동행이 있든 없든 간에 인간은 삶의 공허함을 벗어날 수 없는 듯하다.



그 존재의 허전함을 평소 느끼지 못하던 사람도 한 해의 마지막 장을 남겨놓은 달력을 넘길 때 문득 착잡해진다. 달랑 한 장 남은 탁상달력에 적힌 몇 건의 송년회 일정들. 삶이 쏜살같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운다. 2012년을 시작하면서 뭔가 해보겠다고 다짐한 것이 어제 같은데 그다지 성과도 없이 올해 역시 그냥 보냈구나 하는 아쉬움과 미련만 쌓여간다. 연말을 맞아 한 취업포털이 직장인 54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연초에 세운 목표 달성률이 평균 32.4%로 집계됐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이유로는 게으름과 나태함(55.2%)이 가장 많았다. 꼭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것도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려나 모르겠다. 아무튼 12월이 열리면 으레 마음으로 반성문을 써보곤 한다. 해마다 되풀이하는 연례행사인데도 가슴 한편 쓰려옴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지난 주말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의 승강장에서 정진규 시인의 ‘별’과 만났다. 9행짜리 시는 허기진 삶, 팍팍한 현실에 지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준다. 환한 대낮 같은 세상 대신에 지금 사방이 막막하고 깜깜한 처지에 빠져 풀 죽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공감과 위로를 전한다. 별은 늘 그 자리에 있으나 낮엔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어둠이 있어야 반짝이는 별을 볼 기회도 생긴다. 각자 할당받은 암흑의 구간을 씩씩하게 견뎌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날 환승을 위해 4호선 사당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며 새겨볼 글귀를 또 하나 만났다.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노력이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더 해야 할 노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도시에선 휘황찬란한 인공 불빛이 사람과 별 사이의 스킨십을 가로막는다. 화가 강찬모 씨는 아무 걸림돌 없는 별들의 합창을 히말라야 설산에서 마주쳤다. 그는 “그 별들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멍석 깔고 누워서 보던 그때의 때 묻지 않은 마음을 돌려주었다”고 말한다. 그 추억과 함께 캔버스에 채집된 형형색색 별들이 장엄한 우주 교향곡을 들려준다. 오색찬란한 별을 보며, 외롭고 힘든 오늘이 바로 별을 볼 수 있고 별을 낳을 수 있는 눈부신 순간임을 기억하기를.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