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글과 시에 관한 이야기/빌려온 글과 시의 이야기

내가 알지 못한 이야기<방통(龐統)과 제갈량(諸葛亮)>

착한 인생 2019. 1. 6. 21:08


   방통(龐統)과 제갈량(諸葛亮)


방통(龐統)과 제갈량(諸葛亮)은 배움에서 한 뿌리 이었다. 두 사람은 수경(水鏡) 선생인 사마덕조(司馬德操 사마휘)에게서 배운 제자들 이다. 형주(荊州)에서는 사마덕조(司馬德操)를 수경(水鏡),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와룡(臥龍)이라 하고, 방사원(龐士元)은 봉추(鳳雛)라고 했다. 이는 방사원의 숙부이자 사마휘가 형님으로 모시던 방덕공(龐德公)이 말한 것이다.

방덕공은 양양(楊陽) 사람이다. 제갈량이 그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홀로 상() 아래에서 배례(拜禮)했다. 방덕공은 그런 제갈량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청아(淸雅)한 사마휘는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鑑識眼)이 있었다. 방통은 어린 시절 소박하고 우둔하며 풍채가 좋지 못했으므로 귀함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방덕공은 방통을 귀하게 여겼다.

방통(龐統 178~213년 또는 179~214)은 삼국시대 촉()의 군사(軍士)이다. 자는 사원(士元)이고, 별호(別號)는 봉추(鳳雛)이며, 양양군(楊陽郡) 출생이다.

방통이 20세 때 방덕공은 사마휘를 만나 보도록 했다. 남군(南郡)에 있던 방통은 사마휘가 영천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2천리나 달려가서 방문했다. 마침 사마휘는 뽕잎을 따고 있었다. 사마휘는 나무 위에서 뽕잎을 따며 방통은 나무 아래에 앉아있게 했다. 그들은 낮부터 밤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방통과 이야기를 나눠 본 사마휘는 덕공(德公)은 실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방통은 성덕(成德)을 지녔다.”며 감탄했다.

사마휘는 방통을 매우 특이한 인물로 여겼다. 남주(南州) 선비들 중에서 제일인자가 될 만하다고 했다. 이로부터 방통의 명성은 점점 빛나게 되었다.

그 이후 방통은 군()으로부터 공조(功曹)에서 일했다. ()의 보좌관으로서 공훈을 조사해 기록하는 직책 이었다. 그 다음에는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임명된 주유(周瑜)의 휘하에 들어갔다. 주유는 방통에게 수공(垂拱)하였다. 수공은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팔짱을 낀다는 뜻으로 어떤 일도 하지 않고 남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는 의미이다.

이는 주유가 방통을 초빙하여 등용한 것이 아니다. 방통이 형주목 유표(劉表) 시절부터 남군의 공조라는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둔 것이다.

방통이 유명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유비(劉備)와 인연을 가지면서 부터이다. 삼국지 선주전에 따르면 양양기(襄陽記)에서 이르기를 유비가 세상의 일을 묻기 위해 사마휘를 만나러 갔다.

사마휘는 유생속사가 어찌 세상사를 알겠는가. 시무(詩務)를 아는 자가 준걸인데, 그 중에는 복룡(伏龍)과 봉추(鳳雛)가 있다.”라고 했다. 유비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물으니 사마휘가 말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방사원(龐士元)이다.”

유비가 형주를 다스릴 때 방통은 주 자사를 보좌하는 관직으로 주로 문서를 담당하는 종사(從事)로서 뇌양현(?陽縣)의 현령(縣令)을 대행했다. 그러나 방통은 현()에 재임하여 치적(治績)을 쌓지 못해 면직 되었다.

이에 오()의 노숙(魯肅)이 유비에게 방통을 추천하면서 백리지재(百里之才)라고 했다. “방사원(龐士元)은 현을 다스릴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 치중(治中)을 맡겨야 비로소 인걸의 재능을 펼 수 있다.”고 했다. 치중은 치중종사(治中從事) 또는 치중종사사(治中從事史)라고도 하며, 주목(州牧), 군수(郡守)의 속관(屬官)이다. 내정을 담당하는 수석 보좌관으로 주군(州郡)의 문서를 관리했다. 또한 별가(別駕)로 별가종사(別駕從事)나 별가종사사(別駕從事使)라고도 하는데 주목(州牧), 자사(刺史)의 속관(屬官)이다. 주목이나 자사가 군현을 순행(巡行)할 때, 그는 따로 수레를 타고 수행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유비는 제갈량으로부터도 방통에 대해 그런 말을 듣고 방통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눴다. 이후 방통을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삼았다. 마침내 유비는 제갈량과 함께 방통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으로 삼았다. 군사중량장은 유비가 만든 임시직으로 군() 작전을 계획하고, 동시에 병권(兵權)을 가진 직책이었다. 제갈량은 방통에 대한 유비의 질문에 시기하지 않고 중용하도록 도왔다.

구주춘추(九州春秋)는 방통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방통이 유비를 설득했다. “형주(荊州)는 황폐해졌다. 인물들은 거의 없어졌다. ()으로는 오의 손권이 있고, ()으로는 조조가 있으니, 세발 솥 다리(鼎足)의 계책은 그 뜻을 이루기 어렵게 되었다. 지금 익주(益州)는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들은 강하다. 호구가 백만이나 된다. 사부(四部)마다 병마가 있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갖춰져 있다. 보화를 밖에서 구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런 임시적 방책을 빌어 대사를 정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에 유비가 말했다. “지금 나에게서 물과 불의 관계 같은 것이 조조이다. 조조가 급박하게 하면 나는 관대히 했고, 난폭하게 하면 나는 인자하게 대했으며, 속임수를 쓰면 나는 충성을 했다. 매번 조조와 반대되게 행동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 작은 이유 때문에 천하에 신의(信義)를 잃는 것을 나는 취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방통이 다시 권했다. “권도(權度)로 변화해야 하는 때이다. 실로 한 가지 방법으로만 능히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약한 나라를 겸병하고 정치가 혼매(昏昧)한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옛날 오패(五覇)가 했던 일이다. ()으로 취하여 순()으로 지켜서 의()로써 보답하고, 대업이 정해지고 난 뒤에 큰 나라에다 봉하면 신의에 무슨 부담이 있겠는가. 지금 취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이익이 될 뿐이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유비가 방통의 계책을 시행했다.

강표전(江表傳)은 유비와 방통의 친밀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유비는 방통과 함께 풍족한 연회를 열어 대화를 나누었다.

하루는 유비가 방통에게 물었다. “()이 주유의 공조 이었을 때 내가 오()에 갔었다. 듣기로 은밀히 손권에게 말해 나를 머물러 두게 할 것을 권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 주인에 속해 있을 때는 그 주인을 위하는 법이니 경은 숨김없이 말해 봐라.”

방통이 그런 일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유비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그때 위급하여 응당 요청할 것이 있어 그 때문에 갈 수 밖에 없었다. 하마터면 주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뻔 했다. 천하의 지모 있는 선비들은 그 소견이 대체로 같다. 그때 공명(孔明)이 내가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며 그 뜻이 홀로 독실했다. 이 일을 우려한 것이었다. 나는 손권이 방비하는 곳은 북쪽이니 응당 내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오나라로 갈 것을 결심 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실로 위급한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만전의 계책은 아니었다.”
211년 건안 16년 제갈량은 남아서 형주(형남 5)를 진수(鎭守)했다. 방통은 유비를 수종(隨從)하여 촉()의 사천성으로 들어갔다.

유비는 형주 통치를 위해 제갈량과 관우 등을 남기고, 보병 수만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다. 유비가 익주(益州)에 도착하였을 때 유장(劉璋)이 군사를 늘려주었다. 그 결과 그가 거느린 병력은 무려 3만이나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의 손권은 유비를 교활한 노예를 지칭하여 쓰는 활로(猾虜)라는 말로 욕을 했다.

유비가 부성(副城)에 도착했을 때 유장이 직접 영접했다. 장송(張松)은 법정(法正)을 시켜 유비와 방통에게 곧바로 회담 장소에서 유장을 습격할 수 있다고 진언하였다.

유비는 이는 중대한 일이므로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익주목(益州牧) 유장이 유비와 부성에서 회견을 가졌다. 방통이 다시 장송의 계책을 말하였다.

지금 이 회담을 이용하여 유장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주군께서는 병사를 쓰는 수고로움 없이 앉아서 서천을 평정할 수 있다.”

유비가 말했다.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 들어왔다. 은혜나 신의를 아직 보이지 못했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이 부분을 삼국지연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법정이 방통에게 장송이 보낸 밀서 속의 계책을 말했다. 때를 놓치지 말고 부성에서의 연회 도중 유장을 암살하라는 내용 이었다. 방통은 법정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법정과 함께 유비를 찾아가 장송의 계책대로 하자고 말했다. 유비가 듣지 않았다. 방통은 비밀리에 위연(魏延)을 불러 연회의 흥을 돋운다는 핑계로 칼춤을 추다 기회를 봐서 유장을 죽이도록 지시를 내렸다. 다른 장수들에게는 유장이 죽는 동시에 그 부하들을 모조리 사로잡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연회석상에서 장임(張任) 등 서천 장수들이 위연을 막고, 유비와 유장이 나서서 칼춤을 중지하여 실패 했다.

유장이 성도로 돌아간 이후, 유비는 유장을 위해 북으로 한중(漢中)인 양주(梁州)와 동천을 정벌하려고 했다. 방통은 이에 또 다시 진언했다.

은밀히 정예병사를 선발하여 밤낮으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는 겸도(兼道)로 성도를 습격하면 된다. 유장은 본래 무용이 없다. 평소에도 미리 방비하지 않으니 대군이 갑작스럽게 이르게 되면 한 번의 행동으로 평정할 수 있다. 이것이 최상의 계책이다. 양회(楊懷)와 고패(高沛)는 유장의 명장으로 강력한 병사를 갖고 관두(關頭)를 지키고 있다. 듣건대 이들은 유장에게 여러 차례 주군을 형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간언했다. 주군이 아직 도착하기 전에 사자를 보내 그들에게 통보하여 형주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으므로 돌아와 구원을 바란다고 설명하고, 아울러 군대가 행장을 꾸려 외견상 돌아가는 형세를 만들도록 하면 된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은 주군의 영명(英名)에 감복하고, 주군이 가는 것을 좋아 할 것이므로 틀림없이 가벼운 차림의 말을 타고 만나러 올 것이다. 주군은 이 기회에 그들을 붙잡아 놓고, 진군하여 그들의 병사를 빼앗아 성도로 향하면 된다. 이것이 다음으로 좋은 계책이다. 마지막 계책은 물러나 백제성으로 돌아가 형주까지 연결하여 서서히 일을 강구하는 것이다. 만일 깊이 생각만 하다가 하지 못한다면, 장차 큰 곤경에 처하게 되어 오래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유비는 두 번째 계책을 채용하여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었다. 군사를 돌려 성도로 향해 가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는 부성(副城)에서 승리의 축하 연회를 개최 했다. 방통에게 말했다. “오늘의 연회는 즐겁다고 할 만한가.” 방통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나라를 토벌하고 즐겁다고 여기는 것은 어진 사람의 군대가 아니다.”

술에 취한 유비는 노()하여 말했다. “무왕이 주를 토벌할 때 앞에는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있었고, 뒤에는 춤추는 사람이 있었으니, 어진 사람이 아니었겠다. 그대의 말은 맞지 않다. 빨리 일어나 나가라.”

방통은 머뭇거리다 물러났다. 유비는 곧바로 후회하고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방통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방통은 유비를 돌아보며 사과하려 하지 않았다. 태연하게 음식만 먹었다. 유비가 말했다.

방금 했던 논쟁에서는 누가 잘못한 것인가.” 방통이 대답하였다.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한 것이다.” 유비는 크게 웃었고 처음처럼 연회를 즐겼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방통이 제갈량과 공적功績)을 경쟁 한 것으로 묘사 되었다. 방통이 유비 진영에 합류한 신참(新參)으로서 하루 빨리 공적을 더 세워 보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제갈량의 진언을 무시했다. 당시 관우와 함께 형주(荊主)를 수비하고 있던 제갈량이 서신을 통해 천문(天文)과 관련하여 무언가 불길한 징조가 있음을 알려왔다. 그럼에도 방통은 급히 군마(軍馬)를 양 갈래로 나눠 낙성으로 진격했다. 큰길은 유비와 황충이 작은 길은 방통과 위연이 맡았다. 방통은 진격하던 도중 서천 장수 장임의 매복에 걸려 무수한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 꼴이 되어 낙봉파(落鳳坡)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 촉서(蜀書) 방통법정전에서는 방통이 면죽(綿竹)을 함락시킨 이후, 계속 군세를 이끌고 진군하여 낙현(?)을 포위하고 공격하던 중 유시(流矢)에 맞아 진중(陣中)에서 21336세의 나이로 사망 했다고 한다. 유시는 누가 어디서 쏘았는지 모르게 날아오는 화살로 눈 먼 화살 또는 흐르는 화살을 말한다.

참고로 당시 낙성전투(?城戰鬪)1년 이상 지속 되었다. 방통이 격전 도중 전사하기 전에 유순(劉詢), 유괴(?)와 더불어 낙성을 지키고 있던 서천 장수 장임의 군사를 낙성 근교에 위치한 안교(雁橋)에서 궤멸시키고 그를 사로잡아 참수(斬刑)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임이 삼국지연의의 낙봉파(落鳳坡) 또는 정사의 낙성전투에서 방통을 사살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제갈량과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이 구원군을 이끌고 온 후에 비로소 유비가 장임을 단번에 사로잡았다는 삼국지연의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사에는 구원군이 아닌 형주에서 유비, 방통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서천으로 들어간 호응 군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을 위시한 호응군(呼應軍)은 방통이 죽기 약 1년 전쯤 즉 유비의 본군(本軍)이 부수관(?水關)을 함락시키고 성도로 진군할 무렵에 이미 서촉(西蜀)으로 들어와 익주(益州) 각 지방을 평정 중이었다.

이들의 합류는 214년 건안 19년 본군이 낙성을 함락시키고 난 후 성도를 포위할 무렵으로 보인다. 따라서 처음부터 유비의 본군 3만과 1~2만의 호응 군세간에 이미 이러한 전략이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유순, 유괴 등이 굳게 지키는 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1년 넘게 치열한 대치 상황에 있었다.

실제로 낙성 근교에 위치한 안교(雁橋)에서 장임을 사로잡은 건 제갈량의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신산(神算)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유예주(劉豫州)의 용병술과 군사 방통, 법정의 책모(策謀), 그 수하 장수 황충(黃忠), 위연(魏延), 유봉(劉封) 등의 용맹함에 의해서 이었다.

장임은 형주의 제갈량 등이 유비군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입촉(入蜀)과 익주(益州) 각 지방을 평정하기 전후로 군패(軍敗)하여 죽었다. 방통은 장임이 사로잡혀 참수당한지 몇 달 뒤에 위연과 더불어 낙성의 공성전(攻城戰)을 치르는 도중 유시(流矢)에 맞아 진중에서 사망했다.

정사 기록에 의하면 방통과 장임 둘 다 213(건안 18)에 죽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대체로 214(건안 19)에 죽은 것으로 묘사 된다.

장임이 매복을 써서 방통을 사살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후세사람들이 방통이 낙성전투에서 격전 도중 눈 먼 화살에 맞아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낙봉파(落鳳坡)라는 허구 속 지명과 전설 등을 창작하여 구전(口傳)해오던 것을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이 제갈량 띄우기에 적극 활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을 방통에 대비하여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관련 민담을 채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장임의 경우 이런 허구를 통해 서천의 충용한 무명장수에서 명장으로 평가가 격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비는 방통의 죽음을 통석(痛惜) 하게 여겨 제위에 오른 후 방통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와 정후(靖侯)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방통의 아버지를 의랑(議郞)으로 임명한 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옮기게 했고 제갈량이 친히 임명했다.

방통의 숙부 방덕공(龐德公)은 방덕(龐德)과 동명이인의 인물이다. 덕공의 아들 방산민(龐山民)이 제갈량의 작은누나와 결혼해 방통은 제갈공명과는 사돈(査頓) 사이 이었다. 사마휘 보다는 열 살 위이고 조카인 방통보
다는 열다섯 살 위이다.

제갈량은 방통과 함께 유비의 군사 이었다. 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제갈량 특유의 경쟁심리로 인해 방통이 그 날개를 펼쳐보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후 이엄(李嚴)과 요립(寥立)의 희생 그리고 관우, 팽양(?), 위연 등의 척살이 이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방통이 서촉정벌을 수행할 당시 형주를 지키고 있었던 제갈량이 손권에게 대한 답신에서 방통과 요립(寥立)은 초()나라의 우수한 인재로 후세에 전해질 제왕의 사업을 보좌하여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다.” 라며 훗날 서민(庶民)으로 강등되는 요립을 은근히 방통과 함께 묶었다. 또한 서촉정벌 중에 방통의 천거를 받은 뒤 승승장구했던 팽양을 좌천한 것도 방통을 의식한 것으로 여겨진다.

후에 팽양은 그의 야심(野心)을 경계한 제갈량의 진언으로 강양태수(江陽太守)로 좌천당했다. 이에 팽양은 마초(馬超)를 찾아갔다. 위로의 말을 건네는 마초에게 팽양은 유비가 이미 늙어 황망하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대가 군사를, 내가 내정을 잡으면 천하도 노릴 수 있을 터인데라는 말을 하여 역모(逆謀)를 꾀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다. 처형당하기 전에 제갈량한테 감옥에서 써서 보낸 장문(長文)의 편지에서 나는 조조(曹操)를 토벌하자는 의미로 말한 것인데 마초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며 변명했다. 또한 방통이 급작스럽게 화살에 맞아죽는 바람에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글을 남겼다.

과거에는 항상 방통과 함께 서로 서약을 하여, 그대의 지위를 따르고 주군의 사업에 마음을 다하여 고인의 이름을 좇고 공훈이 역사책에 기록되기를 희망했다. 방통은 불행하게도 전사했으며, 나는 스스로 재앙을 취해 패망(敗亡)했다. 나 스스로 이곳까지 떨어졌는데 장차 또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방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방통은 사람을 견줘보는 것과 경학(經學), 사모(思謀)를 좋아 했으므로 당시의 형()과 초()의 사람들은 그를 고준(高俊)한 사람이라고 했다.

같은 스승에게서 배우고 같은 주공을 섬긴 방통과 제갈량. 사마휘는 유비에게 와룡(臥龍)과 봉추(鳳雛) 중 한사람만 얻어도 패업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유비는 두 사람을 모두 군사로 거느렸다. 그럼에도 생전에 패업을 이루지 못했다. 천하 삼분지계에서 촉나라 건설에 그쳤다. 사후 제갈량이 수차례 북벌로 실행 했다. 하지만 결국 사마의에게 패했다. 방통과 제갈량의 인연은 특별한 상극은 아니었지만 상생도 아니었다. <홍성남(강북구)장무상망|조회 36|추천 0|2012.12.22. 09:31 / 신산국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