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軍)은 예나 지금이나 철저하게 ‘소비’하는 집단이다. 이는 직업군인이든 시민군이든 마찬가지다. 평소 생업에 종사하던 시민군도 일단 전선(戰線)에 나서면 온종일 쟁기 대신 창칼을 들어야 했다. 이들을 먹여살리는 건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부담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군이 소비하는 막대한 물자, 특히 식량은 고대인류에게도 골칫거리였다.
전시(戰時)체제로 전환되면 국고가 바닥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연히 높은 세율로 이를 충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백성들은 말 그대로 ‘등골’이 휘어졌다.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어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긴 사마충(司馬衷) 같은 혼군이 아닌 이상 치자(治者)는 치자대로 여론을 잠재우고 군수품을 확보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런데 고대 동아시아에서 그야말로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획기적이라고 해서 거창하고 복잡한 뭔가가 있는 게 아니다. 오늘날의 민방위 모토와도 일맥상통하는 지극히 단순한 개념이다. “그럼 군인도 생산하면 되지” 바로 둔전(屯田)의 출현이다.
명장(名將)도 굶으면 배고프다
전쟁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달린 큰 사업이다. 근대부터 미국, 유럽 등 서양에서도 군인 필독서로 자리잡은 손자병법(孫子兵法. Art of war)의 저자 손무(孫武)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상책” “다섯가지 원칙, 일곱가지 계산으로 피아(彼我) 상황을 정확히 탐지한 뒤 전쟁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간전쟁 때 2001~2016년 사이 미국이 쏟아부은 전비(戰費)만 해도 7천830억달러(약 890조원)인 것으로 알려진다. 아프간 재건비용도 1천173억달러(약 133조원)에 육박했다. 이라크전쟁까지 합쳐 ‘두 개의 전쟁’을 동시수행한 이 전무후무한 ‘쇼 미 더 머니’는 ‘천조국’ 미국이었기에 그나마 감당할 수 있었지 미국을 제외한 다른 어떤 나라도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고대~중세에는 전쟁에 ‘이기고서도 망한’ 나라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명(明)나라는 조선을 도와 임진왜란에 대군을 파병한 여파로 나라가 기울어 여진족(만주족) 등 주변민족 관리를 소홀히 한 결과 파국을 맞았다. 물론 황제 역사상 최초로 ‘파업’을 공식선언한 만력제(萬曆帝)의 실정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막대한 은자 유출도 멸망에 적잖이 기여한 게 사실이다. 명나라는 조선에 출병하면서 은을 지급하고 현지에서 곡식을 사 먹도록 했다.
그런데 전쟁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한때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전한(前漢)의 정복왕 한무제(漢武帝) 때 기발한 발상이 나온다. 그렇다. ‘둔전’이다.
무제는 그야말로 ‘전쟁의 신’이었다. 본시 한나라는 건국자인 고조 유방(劉邦)이 흉노 우두머리 묵돌선우(冒頓單于)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로 흉노를 ‘큰형님’으로 모시던 형편이었다. 한나라 신세가 얼마나 형편없었냐면 기원전 192년 유방이 사망하고 묵돌이 그의 부인인 여후(呂后)에게 편지를 보내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메워 봄이 어떤가”라는 희대의 ‘성희롱’을 저질러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막대한 은자 유출도 멸망에 적잖이 기여한 게 사실이다. 명나라는 조선에 출병하면서 은을 지급하고 현지에서 곡식을 사 먹도록 했다.
초한쟁패(楚漢爭覇) 과정에서의 국력손실로 인해 흉노에 맞설 기력이 없던 한나라는 매년 무명, 비단, 술, 곡식에 심지어 왕소군(王昭君) 등 여성들까지 바치면서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그리고 기원전 141년 무제가 제7대 황제로 등극하면서 변화의 바람을 맞는다.
무제가 발탁한 장수 곽거병(藿去病)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낙하산’이었다. 민가의 ‘사생아’ 출신이었던 그는 이모가 황제의 후궁이 되면서 졸지에 벼슬에 오른다. ‘낙하산’ 하면 흔히 ‘무능’ ‘탐욕’이 먼저 떠오르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적지 않지만 곽거병은 달랐다. 타고난 자질인지 그는 무제의 명을 받자마자 ‘우주를 뚫어버릴 기세로’ 군사를 끌고 북진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123년 그는 약관 18세의 나이에 기병 800여명을 인솔해 본대를 떠나 진군한 결과 일거에 흉노 2000명 이상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전공을 세운다. 121년에는 대장군 다음 가는 직위인 표기장군(飇驥將軍) 작위를 받기 무섭게 또다시 군사 1만여명을 이끌고 출병해 흉노의 왕 두 명을 참수했다. 참고로 흉노에게 있어서 지도자는 ‘선우’이며 왕은 지방영주의 개념이다.
그해 여름에는 선봉으로 출격해 뒤따르던 본대의 지원 없이 기련산(祁連山)을 점령하고 3만이 넘는 적군을 참했다. 이때 흉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사기(史記)에 실린 흉노민요인 ‘서하구사(西河舊事)’에는 “기련산을 잃으니 육축(六畜)이 번식할 수 없게 됐다”는 내용이 있다. 목축으로 연명하던 흉노의 대규모 방목지를 빼앗는 큰 전공인 셈이었다.
119년에는 대원정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곽거병은 5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해 외몽골의 사막폭풍, 시베리아의 설한풍을 뚫고 바이칼(Baikal)호수에까지 이르게 된다. 중국이 이 정도 거리를 행군한 건 수백년이 지난 당(唐)나라에 가서야 다시 재현된다.
이렇듯 ‘신들린’ 정복전쟁에 나섰던 무제에게도 골칫거리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보급’이었다. 물론 무제는 내정에서는 백성의 안위 따위는 ‘쌈 싸먹은’ 폭군으로 일컬어지지만 백성은 둘째친다 해도 보급이 안 되면 병사들이 굶주려 전쟁에서 패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고민 끝에 무제는 둔전, 정확히 말하면 군둔(軍屯)을 실시한다.
늦었지만 둔전(군둔)을 설명하자면 쉽게 말해 장병들이 ‘전투가 있을 때는 싸우고 없을 때는 밭을 가는’ 제도다. 치자 입장에서는 군량도 얻고, 병사들 훈련도 시키고, 백성들 부담도 덜어주는 ‘1석3조’의 정책이었다. 소 등 농업자산은 모두 관가에서 대여해 병사들 입장에서도 ‘밑천’ 걱정은 없었다.
18세기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Napoleon)이 “군대는 먹어야 전진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군사행정에 있어서 보급은 절대적이다. 아무리 날고 뛰는 명장, 용장이라도 굶으면 몸도 가누기 힘든 게 사람이다.
둔전, 오늘날에도 있다!
무제 시기의 둔전은 상세한 기록이 없지만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잘 알려진 후한(後漢) 말기에 가면 둔전의 형태가 상세히 묘사된다.
‘황건적(黃巾賊)의 난’ 이후로 한나라는 그야말로 ‘거덜난’ 상태였다. 백성들은 전란을 피해 논밭을 버리고 유랑민이 되거나 산적으로 전업했으며 후한 전성기 때 5000만명에 달했던 인구는 황건적의 난에 더해 군웅할거(群雄割據)까지 겹치면서 무려 ‘800만명’ 수준으로 떨어진다. 전란 속에 죽은 사람들도 있지만 거주지를 떠나 ‘실종자’ 처리된 사람들이 많았다.
버려진 땅에서 곡식이 저절로 돋아날 리 없으니 자연히 군량보급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둔전의 주인공인 조조(曹操)는 서기 193~194년 후한 13주(州) 중 하나인 서주(徐州)를 점령한 뒤 10만명 이상의 현지백성들을 모두 학살할 정도였다. 군사들 먹일 쌀도 없는 판국에 이들까지 먹여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청주병(淸州兵) 등 조조의 군사들은 대부분 패잔병 출신의 ‘노예’였다. 이들은 대를 이어 군인이 되어야 하는 병호제(兵戶制)에 묶여 있었으며 조조는 이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개간하게 함으로써 상술한 둔전제 특유의 장점들 외에 병호들의 불만도 억누르는 효과를 도모했다. 병호들로서는 대대손손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대신 최소한 가족이 ‘굶어죽을’ 위기는 모면하게 된 입장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지라 둔전이 비단 중국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신라도 적은 분량이지만 사서에 둔전이 언급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본격 시행된다. 서양에서는 동로마제국이 테마(θέμα)제도를 시행했으며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러시아와 대치 중인 홋카이도(北海道)에 둔전병을 주둔시켰다.
경제수준이 급격하게 높아진 오늘날 21세기에도 둔전을 행하는 곳이 있다. 다름아닌 ‘북한’이다. ‘백두혈통’ 유흥비, 핵개발 등에 대부분의 예산이 쓰이는 특성상 북한은 인민군에게 ‘자력갱생’을 요구하고 있다. 병사들에게는 ‘콩농사 전투’ 등 과업이 주어지며 일부는 서해에서 조업에 나서기도 한다.
그리고 ‘백두혈통’은 “이 모든 게 미제(米帝)와 그 앞잡이인 남조선 보수괴뢰패당의 공화국 대결책동 때문”이라고 선전하고 책임을 전가하면서 조선중앙TV 카메라 앞에서는 ‘쪽잠에 줴기밥’ 코스프레를 하고 주석궁에서는 ‘헤네시꼬냑’으로 축배를 들고 있다. 물론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외국방송을 몰래몰래 청취한 주민들은 대부분 이를 믿지 않지만 ‘세뇌’ ‘감시’의 힘은 커 ‘봉기’ 조짐은 적어도 수면 위에서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덧붙이자면 아무리 빈곤한 북한군이라 해도 얕봐서는 안 된다. 본 기자가 과거 수년 간 대북(對北)취재를 하면서 만난 군 출신 탈북자들은 ‘깡’ 만큼은 살아 있었다. 사실 평균 10년의 복무기간 동안 굶어가면서 사상교육을 받는 가운데 ‘독기’가 오르지 않는 게 이상하다. 일부 장교의 경우 체격도 좋은 편이었다.
‘북한군은 약하다. 그러므로 우리도 국방력을 줄여도 된다’는 그릇된 논리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향이 있어 부연한다. 아무리 첨단무기가 발달한다 해도 결국 남북통일을 위해 평양에 태극기 꽂는 건 보병이 손수 해야 한다. 백병전은 기계가 대신 해 주지 않는다.
말 많고 탈 많았던 둔전… 평가는?
둔전이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우선 병사들의 피로도가 컸다. 말이 좋아 ‘훈련 겸 농사’이지 싸움터에서 돌아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농사라는 중노동에 내몰린 병사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처음에는 ‘가족을 먹여살린다’는 의무감에 발 벗고 나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는 누적돼 군심(軍心)이 흐트러졌다.
세금도 문제였다. 둔전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이 100% 경작자 소유는 아니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서주대학살, ‘역적모의’ 등 영향으로 악당으로 그려지지만 실상 한나라 재건이라는 이상에만 매달린 유비(劉備), 지방호족들에게 휘둘린 손권(孫權)보다 더 백성을 위한 정치를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 조조는 병사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납세를 3년 유예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당초 20%였던 세율은 후에 50%까지 올라간다. ‘뼈 빠지게’ 싸우고 일해 만든 생산물의 절반을 나라에 바쳐야 하는 셈이었다. 이같은 부작용들로 인해 엄격한 군율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민간약탈은 끊이지 않았으며 이후 발견된 다양한 문제점까지 겹쳐 조조의 둔전은 그의 사후 약 40년만에 막을 내린다.
둔전은 병사뿐만 아니라 주둔지 백성들에게도 큰 부담을 안겼다. 농사라는 건 그저 황무지에다가 모종을 심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일구고 또 일궈서 지력(地力)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가장 좋은 둔전지는 ‘남이 일궈놓고 버린 땅’이며 자연히 점령군을 피해 일시적으로 도주한 주둔지 백성들은 영원히 이 땅을 되찾을 수 없는 신세가 돼 길거리로 나앉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둔전제였지만 거시적으로 보자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게 정치라면 ‘소수’를 희생해 ‘다수’를 살린 둔전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병사, 백성들이 더 희생됐을지 알 수 없다. 둔전이 없었다면 지난 수천년 간 장거리원정에 나서야만 했던 역사상 수많은 병사들은 보급을 기다리다 지쳐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싸우기도 전에 줄초상을 맞아야 했을 것이며, 백성들은 수십만 군사를 매 끼니 먹여살리느라 날아드는 세금고지서 앞에 정작 내 가족 입은 챙기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북한의 둔전의 경우 ‘다른 목적’ 즉 병사들이 편하게 딴 생각 못하게 ‘굴리려는’ 의도도 있어서 달리 평가해야 겠지만.
민생과 국방 사이에서 고민했던 동서양의 치자들을 허탈하게 만든 사건도 있었다. 바로 몽골제국의 서방원정이다.
농업사(史)에 일대 전환기를 불러온 질소비료, 신속한 수송을 가능케 한 열차, 멸균을 통한 신선보존을 보장한 통조림 등이 태동한 산업혁명 이후에야 가능해진 대규모·장거리원정을 그들은 불과 13세기에 이뤄냈다. 비결은 ‘육포’였다. 그들은 ‘비료’가 필요 없는 고기를 ‘멸균’한 육포로 만들어 ‘신속한’ 말(馬)을 통해 전선까지 수송했다. 군에서 힘들이지 않고 ‘자체조달’하기에 몽골백성·병사들의 부담은 농경국가의 그것에 비해 대단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다 좋자는 뜻에서 둔전을 시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온갖 욕을 배불리 먹어야만 했던 한나라 승상 조조, 동로마제국 황제 니키포로스(Νικηφόρος) 2세가 천당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봤다면 그 심정은 어땠을까. <끝>
'[D] 글과 시에 관한 이야기 > 빌려온 글과 시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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