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한시교실/ ☞ 한국여류 한시

이옥봉[ 李玉峯, 조선]

착한 인생 2019. 2. 8. 19:29


   

이옥봉

[ ]

이옥봉()은 양녕대군의 고손자인 자운() 이봉(, 1526~?)의 서녀로 운강() 조원(, 1544~1595)의 소실이다. 이봉은 종실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했으며 이후 사헌부 감찰, 옥천 군수를 지냈다. 그는 옥봉의 글재주를 기특히 여겨 해마다 책을 사주었으며, 옥봉의 문재()는 날로 좋아져 특히 시를 잘 지었다고 한다. 옥봉은 비록 서녀였지만 자신이 왕실의 후예라는 점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월도중)
(오일장간삼일월) 닷새는 강을 끼고 사흘은 산을 넘으며
(애사음단노릉운) 슬픈 노래 부르다 노릉의 구름에 끊어졌네
(첩신역시왕손녀) 이 몸 또한 왕손의 딸이니
(차지견성불인문) 이곳의 두견새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이 시는 영월을 지나면서 단종의 애사()를 생각하며 지은 것으로, 그는 같은 왕가의 사람으로서 느끼는 처연한 심정을 담아내고 있다. 더불어 그는 자기 또한 ‘왕손의 딸’이라고 하여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의식을 강하게 표명하고 있다. 옥봉은 이런 가문에 대한 자긍심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던 것 같다. 시집 갈 나이가 되어서도 그는 자신의 재능을 자부하여 재주와 문망이 일세에 뛰어난 사람을 구해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운강 조원이 풍의()와 문장이 뛰어남을 알고 그 문채()를 사모하여 스스로 첩이 되기를 원했다. 옥봉의 아버지가 그 뜻을 알고 운강에게 사실을 말하였으나 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봉은 운강의 장인인 신암() 이준민()을 찾아가 그 사정을 말하니 신암이 웃으며 허락하고, 운강에게 옥봉을 받아들일 것을 권하여 마침내 조원의 소실이 되었다.

조원은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1564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여 1575년 정언이 되었으며 이조좌랑, 삼척부사를 거쳐 1593년 승지에 이르렀다. 옥봉은 운강이 괴산군수, 삼척부사 등 외직에 나갈 때 동행했으며, 운강은 옥봉의 글재주를 인정하여 그의 친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도 글을 짓게 하였다.

옥봉은 당대 문인들에게도 시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이덕무는 『청비록()』에서 옥봉이 서목사의 소실이 보내준 큰 현판 글씨에 감사하며 답례로 쓴 시인 〈사서목사익소실혜제액대자(使)〉라는 시에 대해 “부녀자로서 대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일이다.”라고 하였다. 옥봉 또한 자신의 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증적자)
(묘예개동치) 묘한 재주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워
(동방모자명) 동방에 우리 모자 이름 날렸네
(경풍군필락)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라고
(읍귀아시성)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네


이 시는 옥봉이 운강의 정실부인에게서 난 아들에게 보낸 시로, 아들과 자신의 문재()에 대한 자긍심을 표출하고 있다. 운강에게는 희정(), 희철(), 희일(), 희진()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시가 누구에게 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 모두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먼저 아들이 쓴 글씨의 위력을 칭찬한 뒤, 그 뜻을 이어 자신의 글 솜씨 역시 뛰어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읍귀()’는 하지장이 이백을 평할 때 ‘귀신도 울게 할[]’ 시인이라고 한 데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본다면 결국 옥봉은 자신의 뛰어난 시재를 이백에 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옥봉의 뛰어난 시재는 소도둑으로 잡혀간 이웃사람을 위해 장사()를 써 주고 그 사람을 풀려나게 한 데서도 볼 수 있다.


(위인송원)
(세면분위경)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소두수작유) 물을 기름 삼아 머리를 빗네
(첩신비직녀)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닌데
(랑기시견우) 임이 어찌 견우이리오


이 시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이웃 여자가 옥봉에게 소도둑으로 잡혀간 남편을 위해 운강에게 글 써 줄 것을 부탁하자 옥봉이 감히 남편에게 써 달라고는 못하고 그 사정을 불쌍히 여겨 자신이 직접 써 준 시이다. 형조의 당상관들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놀라며 이 글을 누가 써 준 것이냐고 묻자 그 여인이 사실 그대로 말하였다. 이에 당상관들은 그 남편을 풀어주고 그 시를 소매에 넣고 운강을 방문하여 공의 기이한 재주를 늦게 안 것이 한스럽다고 하며 돌아갔다. 손님이 돌아가자 운강은 옥봉을 불러 그녀의 행실을 크게 꾸짖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옥봉이 울며 사죄했으나 운강은 끝내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로 옥봉은 운강과 헤어졌으며 다시는 운강을 만나지 못하고 산수와 시로 자오()하며 여도사()로 자칭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옥봉의 시에는 임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시가 많다. 소실이라는 신분 자체가 임을 기다리고 그리워해야 하는 처지인데다 더욱이 친정으로 쫓겨난 처지여서 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규정)
(유약랑하만) 약속을 해 놓고 임은 어찌 이리 늦나
(정매욕사시) 뜰에 매화는 다 지려고 하는데
(홀문지상작) 갑자기 가지 위에서 까치소리 들리니
(허화경중미) 헛되이 거울 보며 눈썹 그리네


이 시에는 온다고 약속한 때가 지나도 오지 않는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신에 의지하여 오늘은 혹시 임이 올까 헛된 기대 속에 화장을 하는 여인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시이다.


(자술)
(근래안부문여하) 요즈음 어떠냐고 안부를 묻는데
(월백사창첩한다) 달 밝은 창가에 이 몸은 한이 많다네
使(약사몽혼행유적) 만일 꿈속의 행동에 자취가 있다면
(문전석로이성사) 문 앞의 돌길이 이미 모래가 되었으리


임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자신에게 누군가 근래의 안부를 묻자 그는 한이 많아 결코 편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임에 대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겹겹이 맺힌 한을 풀기 위해 꿈속에서 문 앞의 돌길이 모래가 되도록 수없이 임을 찾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헛된 행동을 반복하며 임의 사랑을 희구하는 안타까운 여심이 전해지는 작품이다.


(규정)
(평생이한성신병) 평생 이별의 한이 몸의 병 되어
(주불능료약불치) 술도 달래지 못하고 약으로 고칠 수도 없네
(금리읍여빙하수) 얼음 밑 흐르는 물처럼 이불 속에서 눈물 흘리니
(일야장류인부지) 밤낮을 울어도 사람들은 모르리


평생 이별의 한이 깊어 이제는 몸에 병이 되었다. 이별로 인한 병은 술이나 약으로는 달랠 수 없다. 그 병은 오직 임만이 고칠 수 있는 것인데, 임은 볼 수 없으니 밤낮으로 이불 속에서 울 수밖에 없다. 이별의 슬픔이 한으로 이어져 끝내 병을 얻은 애처로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옥봉 [李玉峯]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 3. 25., 조연숙)



'**(2) 한국한시교실 > ☞ 한국여류 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난설헌[ 許蘭雪軒,조선]   (0) 2019.02.08
매창[梅窓,조선]  (0) 201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