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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許蘭雪軒,조선]

착한 인생 2019. 2. 8. 19:37


허난설헌[ ]    

지금까지 여성한시의 주제가 여성의 기본적인 생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약간 색다른 주제를 다루었다 하더라도 작품 수가 극히 한정되었던데 비해 허난설헌(, 1563~1589)은 가정사는 물론 사회적 문제에까지 시선을 돌려 여성한시 문학의 범주를 대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하였다. 그리고 작품 수도 기존 여성한시 작가보다 월등히 많아 남성에게 뒤지지 않는 시작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허난설헌은 초당() 허엽(, 1517~1580)의 딸로 서당(西) 김성립()의 부인이며 교산() 허균(, 1569~1618)의 누이다. 당대 문벌가에서 자란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가 출중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해 8세에 그 유명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殿)〉을 지어 여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당시 유교적 윤리와 제도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신이 중국이 아닌 조선에서 태어난 것과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이백이나 두목지 같이 출중한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세 가지 한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난설헌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난설헌의 시가() 역시 허씨 가문에 비견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김성립은 결혼 후에도 급제를 하지 못하다가 난설헌이 사망하던 해인 28세에 기축증광시의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난설헌은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남편 김성립과도 불화했다. 김성립은 과거시험준비를 구실로 강가에 집을 짓고 따로 생활했기 때문에 사실상 부부간의 정을 누리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난설헌의 시에는 남편에 대한 원사()가 많다.


(기부강사독서)
(연략사첨양양비) 제비는 비스듬한 처마에 쌍쌍이 날아들고
(낙화료란박라의) 떨어지는 꽃잎은 어지러이 비단옷을 스치네
(동방극목상춘의) 깊은 규방에서 멀리 내다보며 봄뜻을 잃었는데
(초록강남인미귀) 강남에 풀 푸르러도 임은 돌아오지 않네


이 시는 중국 『역대여자시집()』과 『명시종()』에는 실려 있으나, 『난설헌집()』에는 음탕하다는 이유로 실리지 못했다. 화자는 꽃을 떨어뜨릴 정도로 서로를 부대끼며 처마 밑을 쌍쌍이 드나드는 제비의 모습을 보며 떠난 임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빈방에서 눈이 미치는 곳까지 멀리 내다보며 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감각적이며 능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동선요)
(자소성리동운산) 자주 빛 퉁소소리에 붉은 구름 흩어지고
(렴외상한앵무환) 발 밖엔 찬 서리 내리고 앵무새 지저귀네
(야란고촉조나유) 깊은 밤 외로운 촛불 비단 휘장 비추고
(시견소성도하한) 때때로 성근 별 은하수 건너가네
西(정동은루향서풍) 똑똑 물시계 소리 서풍에 메아리치고
(로적오지어다충) 이슬 젖은 오동나무가지에 벌레가 우네
(교초파상삼경루) 한밤중 생명주 수건에 눈물 흘리니
(명일응류점점홍) 내일 보면 응당 점점이 붉은 빛이리


깊은 밤 임 없이 홀로 있는 어두운 공간에 외로이 타는 촛불과 성긴 별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런 고요 속에 밤의 깊이를 시각과 청각으로 잴 수 있을 만큼 화자의 감각은 예민하게 작용한다. 똑똑 떨어지는 물시계 소리와 벌레의 울음소리는 외로움의 깊이만큼 크게 울려 화자를 지배하고, 이런 공규()의 적막감은 화자로 하여금 결국 피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오지 않는 임에 대한 원망이나 비난 없이 인내하는 가운데 그는 “길이 한하기는 임의 마음도 저 조수처럼 / 아침에 잠깐 나갔다가 저녁엔 다시 돌아오기를( 退 〈죽지사()〉)”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름의 깊이가 속으로 삼키기엔 너무나 깊었던지 난설헌은 향락을 추구하는 남성들의 자유분방한 행위에 일침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년행)
(소년중연락) 젊은이는 신의를 소중히 여겨
(결교유협인) 의협스런 사람들과 사귀어 노네
(요간옥록로) 백옥 노리개 허리에 차고
(금포쌍기린) 쌍기린 수놓은 비단도포 입고

(조사명광궁) 조회 마치자 명광궁에서 나와
(치마장락판) 장락궁 언덕으로 말을 달리네
(고득위성주) 위성의 좋은 술 사 가지고
(화간일장만) 꽃 사이에 노닐다 해가 저무네

宿(금편숙창가) 황금채찍으로 기생집에서 묵으면
(행락쟁유연) 즐거움에 다투어 더 머물라 하네
(수련양자운) 가 양자운을 가련타 했나
(폐문초태현) 문 닫고 들어앉아 태현경을 초했다는데


젊은 남자들은 대개 신의를 소중히 여기고 의협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무절제한 협기는 잘못하면 젊은이로 하여금 유흥과 환락의 길로 빠져들게 하기 쉽다. 이 시에서는 귀한 집 자제들이 학문에 힘쓰지 않고 술과 여자에 빠져 세월을 탕진하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타락한 남자들의 삶과 10여 년 간 문을 닫고 집안에 들어앉아 우주를 논하는 『태현경()』을 지은 양웅()의 삶을 견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지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환락을 추구하며 무모하게 삶을 허비하는 남성의 행위를 경계하는 것으로, 결국 과거 공부와 독서를 핑계로 집을 나가 유락에 빠져 있는 남편을 비판, 풍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난설헌은 병약하여 친정에서 자주 요양을 하였으며, 게다가 어린 아이 둘을 잃은 정신적 충격으로 온전한 가정생활은 더욱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곡자()〉에는 두 해에 걸쳐 딸과 아들 희윤()을 잃고 뱃속에 있는 아이마저 잃게 될까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지독한 슬픔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곡자)
(거년상애녀)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금년상애자)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애애광릉토) 슬프고 슬픈 광릉 땅에
(쌍분상대기) 두 무덤이 마주보고 서 있구나
(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이 불고
(귀화명송추) 소나무 숲에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초여혼)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현주존여구) 너희 무덤에 맑은 물 부어 놓는다
(응지제형혼) 응당 알겠거니 너희 형제의 넋
(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 따라 노닒을
(종유복중해)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지만
(안가기장성) 어찌 장성하길 바라겠는가
(낭음황대사)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며
(혈읍비탄성) 피눈물 나는 슬픔 속으로 삼키네


당나라 측천무후에게 아들 넷이 있었는데, 무후가 태자 홍()을 독살하여 둘째 아들 현()이 태자가 되었다. 그가 자신도 죽게 될까 두려워하며 지은 글이 〈황대사()〉인데, 결국 그는 무후에게 죽임을 당했다. 백양나무 쓸쓸한 무덤가에서 뱃속에 있는 아이마저 잃게 될까 두려워하며 애곡하는 처절한 모성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난설헌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붕당의 소용돌이에 부친과 오빠, 동생 모두 화를 입는 가화()로 이어졌다. 동인()이었던 아버지와 오빠들이 서인의 탄핵으로 모두 화를 입었고 동생도 벼슬길이 끊기는 참화를 입게 된 것이다. 〈기하곡()〉은 귀양살이하는 오빠 하곡에게 부친 시이다.


(기하곡)

(암창은촉저) 어두운 창가에 촛불 나지막하고
(유형탁고각) 반딧불은 높은 집을 넘나드네
(초초심야한) 깊은 밤 시름겨워 더욱 차갑고
(소소추낙엽) 가을 잎은 쓸쓸히 떨어지네
(관하음신희) 변방에선 소식 드물고
(단우불가석) 끝없는 이 시름 풀길이 없네
(요상청운궁) 멀리서 청련궁을 생각하니
(산공나월백) 빈 산 담쟁이덩굴에 달이 밝네


허봉(, 1551~1588)은 난설헌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난설헌이 21살 때인 1583년 동인()으로 병조판서인 이이를 탄핵하다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갑산으로 이배되었다. 난설헌은 오빠가 있는 곳을 ‘청련궁’이라 하여 오빠를 이백에 견주며, 멀리 적거()하고 있는 오라버니의 안위를 염려하는 형제애를 곡진하게 표출하고 있다.

한편 난설헌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당시 사회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의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그들의 아픔을 대변하고자 했다.


(빈녀음)
(야구직미휴) 밤늦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
(알알명한기) 삐걱삐걱 베틀소리 차갑게 울리네
(기중일필련) 베틀에 있는 한필의 옷감
(종작아수의) 결국 누구의 옷이 되려나

(수파금전도) 손에 가위를 잡았으나
(야한십지직) 밤이 추워 열손가락 곱아지네
(위인작가의) 다른 사람 시집갈 때 입는 옷 지으며
宿(년년환독숙) 해마다 나는 홀로 잔다네


화자는 바느질 길쌈 솜씨 모두 좋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시집도 가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밤늦도록 베를 짜고 추운 밤 곱은 손으로 시집갈 때 입는 옷을 짓지만 결국 자기는 입어 보지도 못하고 해마다 독수공방하는 비애를 한 서린 어조로 형상화하고 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박대 받는 빈녀의 고단한 삶을 통해 시속()의 비정()함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축성원)
(천인제포저) 천 사람이 모두 절구질하니
(토저융융향) 땅 밑까지 쿵쿵 울리네
(노력호조축) 힘들여 쌓는 것은 좋다 하여도
(운중무위상) 운중의 위상 같은 이 없구나

(축성복축성) 성을 쌓고 또 성을 쌓으니
(성고차득적) 성이 높아 적을 막을 수는 있겠네
(단공적래다) 다만 두려운 것은 적이 많이 몰려와
(유성차미득) 성이 있어도 막지 못하는 것이라네


이 시에서 그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백성을 동원해 성을 쌓고 있지만 많은 적이 쳐들어와 성이 있는데도 막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다. 즉 나라에서 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몇 겹으로 쌓고 있지만 지금은 위상() 같은 인물이 없으니 나라의 안위가 성을 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위상은 한나라 문제 때 운중() 태수를 지낸 사람으로 그는 군사들에게 일정한 급료를 주고도 자신의 사비로 닷새마다 소 한 마리씩을 잡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그랬더니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져 흉노들이 감히 운중의 진영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고 한다.

위상의 고사를 인용해 난설헌은 당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위상과 같이 덕으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덕인이 있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수에서 말하는 많은 적은 성의 내부에서 생기는 적을 말하는 것으로 나라를 굳건히 보전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고 안으로는 민심을 얻어 안정된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당대 정치 현실의 문제를 예리한 시각으로 지적해내는 정치적 안목이 돋보이는 시이다. 또한 난설헌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국경에서 싸움하는 변방수비대의 모습과 고뇌, 변방의 상황과 분위기를 보여주는 독특한 시를 많이 지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출새곡()〉, 〈새하곡()〉, 〈입새곡()〉 등이 있다.

한편 난설헌의 시에는 선계()를 지향하는 시가 많은데 이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심적 갈등으로 현실을 초탈하려는 의식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남존여비와 유교적 이념으로 완전하게 무장된 봉건제도에 대해 의식적으로 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제도적으로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억압으로부터 탈출하고자하는 무한한 욕망으로 그는 결국 선계를 지향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선사()〉 87수 등이 있다.

 허난설헌 [許蘭雪軒]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 3. 25., 조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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