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국한시교실/ ☞ 三體詩

용사와 점화

착한 인생 2019. 9. 25. 16:21

한시한담(漢詩閑談)

용사(用事)와 점화(點化)/ 조 영 님

―― 이미 져버린 아침 꽃을 버리고 아직 피지 않은 저녁 꽃을 열어야 한다. ―陸機―

 

예나 지금이나 진부한 생각을 버리고 시를 쓰라는 말은 있어 왔다.

일찍이 한나라의 대문장가 韓愈(한유)는 '오직 진부한 말을 힘써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문장을 짓는 요체'(惟陳言之務去 此乃爲文之要)라고 하였다.

송의 黃庭堅(황정견)은 '다른 사람을 따라 시를 지으면 끝내 다른 사람 뒤에 있게 된다.'(隨人作詩終後人)라 하였으며 陸機(육기) 역시 '이미 져버린 아침 꽃을 버리고 아직 피지 않은 저녁 꽃을 열어야 한다'(謝朝華於已披 啓夕秀於未振)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시인 자신의 진실된 감정을 흉내내지 않고 독창적으로 써 낼 것을 강조한 표현들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시에서도 독창성이 중요하다. 자신의 육성으로 진솔하고 독특한 회포를 드러내었을 때 그 작품은 진정한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다.

 

한시의 작법에 用事라는 것이 있다. 用事란 經書나 史書 또는 詩歌의 시문이 가지는 특징적인 개념이나 사적을 몇 어휘에 집약시켜서 표현하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의 시구를 예로 들어보자.

 

양주 하늘에서 학 타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還他駕鶴楊州天)

화산에서 나귀 타는 일은 명부에 보태리라            (添却騎驢華山籍)

 

典故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이 시구를 보고 무엇인가 비유적으로 쓰였다고 생각할 뿐 보다 적확한 의미에까지는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시의 시제는 '三角山文殊寺'이다. 삼각산은 경기도 楊州에 있는 산(지금의 서울 北漢山)으로 일명 華山이라는 것을 일단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아가 駕鶴楊州(양주에서 학을 탄다)는 '옛날 객들이 모여 각각 자기 욕망을 말하는데, 혹자는 양주자사가 되기를 원하고 혹자는 재물이 많기를 원했으며 혹은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를 것을 원하였다.

이때 한 사람은 앞선 세 사람의 욕망을 모두 합하여 허리에 10만 관의 황금을 차고서 학을 타고 양주 상공을 날았으면 한다'라 한 고사에서 나온 말로 모든 욕망이 골고루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한편 騎驢華山(화산에서 나귀를 타다)은 송의 陳搏(진박)이 흰 나귀를 타고 가서 화산에 은거하였다는 고사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駕鶴楊州는 모든 욕망이 이루어지는 것 혹은 出仕의 의미로, 騎驢華山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하겠다는 의미로 쓰여 결국 삼각산 문수사의 고적한 분위기에 시인이 모든 세속적 욕망을 접어두고 은거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듯 고사의 사건과 관련된 함축된 어휘를 새로운 구문에 변용하여 작품 내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이러한 작법은 고사 특히 중국고사에 익숙하지 않으면 作詩는 물론이고 讀詩조차 어렵게 된다.

 

作詩의 독창성은 상상력이 밑거름이 되어 촉발된다. 시인의 개성이 결여된 채 典據에 의존하여 모방의 차원에 그친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 창작이 될 수 없다. 그래서 點化를 강조하는 것이다. 詩想에서 고사의 활용을 요구하는 것이 用事라 고사의 시상을 변용하여 보다 새로운 기축을 열어서 훌륭한 시를 만드는 것  즉 모방을 통한 재창작이 點化이다. 그래서 이 점화가 잘 되면 오히려 '狐白裘(호백구)를 훔쳐온 솜씨'라고 칭찬받지만 만약 제대로 되지 않으면 蹈襲(도습)이 되며 나아가 剽竊(표절)의 혐의를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러나 용사를 어떻게 점화할 것이며 그 점화를 얼마나 기교 있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작시의 방향은 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시인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억제하여 감각 내지는 감성을 통한 미적 발현이 아니라 일종의 知識으로 실현되는 미의식인 셈이다.

 

고려 때 이규보는 '夫詩以意爲主'(무릇 시는 뜻을 위주로 한다)라 하여 用事를 배격하고 新意를 강조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무릇 시는 뜻을 위주로 한다. 뜻을 이루기가 제일 어렵고 언어의 엮음은 그 다음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뜻이란 시인의 개성적인 사유가 되며 이것은 다름 아닌 시인의 상상력이 된다.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창조해야 한다는 작시 태도를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主體的이면서 個體的인 시인의 내면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옛사람이 글을 지을 때 출처가 없는 것이 없다하였던가? 이규보의 시구에도 蹈襲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의 시에

 

누런 벼 날로 영그니 닭 오리들 기뻐 날뛰나  (黃稻日肥鷄鶩喜)

벽오동에 가을 깊으니 봉황새 수심겨워한다. (碧梧秋老鳳凰愁)

 

라는 시구가 있다. 가을이 되어 벼가 누렇게 익으면 사람은 물론 닭과 오리들도 쪼아먹을 것이 있어 기뻐 날뛰게 된다. 반면에 벽오동나무에 잎새 지는 가을이 오면 오동나무 열매만을 먹는 신성한 봉황은 먹을 것이 없게 되어 수심겨워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규보의 이 시구는 알고 보니 두보의 <앵무새가 쪼다 남은 잘 익은 벼의 낟알, 봉황새 오래 깃든 벽오동 가지(紅稻喙餘鸚鵡粒 碧梧棲老鳳凰枝)>라는 시구에서 뜻을 따온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봄날이 따사로와 새소리 부서지고, (春暖鳥聲碎)

해가 기울어 사람 그림자 길어진다.(日斜人影長)

 

라는 시구도 당나라 시인의 <바람이 따사로와 새 소리 부서지고, 해가 높이 떠서 꽃 그림자 짙어진다.(風暖鳥聲碎 日高花影重)>라는 시구에서 따와 쓴 것이다. 이것은 동인시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평생에 '낡고 진부한 말을 쓰는 것은 죽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피해야 한다'라 하고 남의 글을 베껴쓰는 것은 훔치는 것과 같다고 한 이규보조차도 이렇듯 도습의 흔적이 보이니 독창적인 시인의 개성이 드러난 작시의 어려움을 새삼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이시 제1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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