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楓橋夜泊(픙교야박) 밤에 풍교에 배를 대다.- 張繼(장계)

착한 인생 2019. 1. 7. 20:48


[한시산책]



 


 

楓橋夜泊(픙교야박) 밤에 풍교에 배를 대다.- 張繼(장계)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夜半鍾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밤에 풍교에 배를 대다.

  달 지고 까마귀 울며 하늘엔 서리 가득한
강가 단풍나무와 고기잡이 배 등불은 마주한 채 시름 속에 졸고 있구나.
고소성 밖 한산사
한밤 중 종소리가 객선까지 들리누나.


 


                                    달마저 지고 까마귀도 까악까악 울며 온 세상에는 서리가 가득 내렸다.

                                    강가의 단풍나무와 고기잡이 배에 켜진 불빛을 마주하며 수심에 잠긴 나그네는 잠들지 못한다.

                                    저 멀리 고소성 밖의 한산사에서

                                    깊은 밤에 종소리가 조용한 밤을 타고 나그네가 있는 배에까지 다다르건만.


       시의 앞 두 구는 ‘풍교야박’의 특징적인 풍경과 나그네의 감장을 적고 있다. 달은 지고 까마귀가 우는데 서리가 온 하늘에 가득하다. 이 한밤중의 세 종류의 물상들은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달이 지는 것’은 본 바를 묘사한 것이요, ‘서리가 하늘에 가득한 것’은 느낀 바를 적은 것이다. ‘서리가 하늘에 가득하다’는 것은 사실상 실제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리는 땅에 있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의 느낌에 의해 포착된 표현이다. 밤이 깊어 한기가 시인의 작은 배를 감싸고 이로 인하여 시인은 망망한 밤하늘에 차가운 서리가 가득 찼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몽롱한 밤경치 중에 강변의 단풍나무가 희미하게 보이고 공활하고 고요한 강 위에 달빛이 출렁이며 고기잡이배들이 밝힌 불들이 반짝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그네는 외롭고 싸늘한 객수를 품고 배 위에 누워 있다. 


       뒤 두 구절은 앞 두 구절이 깔아놓은 배경 위에서 하나의 전형적이라 할 만한 사건을 쓰고 있다. 즉 누워서 산사(山寺)의 종소리를 듣는 것이다. 고소(姑蘇)는 소주(蘇州)의 다른 이름이며, 풍교는 지금의 소주성 서쪽 9리에 있고, 한산사(寒山寺)는 그 서쪽 10리에 있다. 풍교에 배를 정박하고 있던 시인에게 가장 깊은 감각적 인상을 전해준 것은 바로 1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한산사의 밤 종소리였다. 달 지고 새우는 것이나, 서리 하늘 가득한 차가운 밤이나, 강 물결 위에 비친 단풍나무와 고깃불, 외로운 뱃사람 등의 풍경은 물론 풍교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기는 하지만, 고요한 밤의 종소리는 더욱 강렬한 인상을 준다. ‘한 밤중의 종소리’는 밤의 고요를 더욱 드러내게 할 뿐만 아니라, 누워서 간헐적인 종소리를 듣는 시인으로 하여금 갖가지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들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맑고 차가운 종소리는 한밤의 정적을 깨뜨리지만 한편 더욱 한밤의 고요함을 드러내고, 배가시키고 있다. 수심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는 얼핏 잠든 어지러운 꿈결 속에 시인의 귓가에 아련히 들려오는 이 산사의 종소리는 어떤 구원의 멧세지와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시인이 어떤 수심을 안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인생의 온갖 고뇌들이 맑았게 씻기어지기를 기원하며 새벽 정성으로 종을 울리는 산승(山僧)의 마음을 담고 있는 이 종소리는 분명 그 어떤 류의 근심이라도 맑게 씻어줄 수 있었으리라. 한산사의 한밤중의 종소리를 묘사함으로써 ‘풍교야박’의 신묘한 운치는 가장 완미한 경지를 얻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唐詩의 絶品 가운데 특히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이다. 객지에 다다른 나그네의 쓸쓸한 심회를 단지 낯선 景物에 부쳤을 뿐인데, 적막한 모습이 ‘愁’자 하나에 집약되어 점점 퍼져나간다.앞의 두 구절과 뒤의 두 구절을 시간 순서가 도치된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는데, 1구의 ‘月落’을 달 지는 새벽으로, 마지막 구절의 ‘夜半’을 이보다 앞선 시간으로 보기 때문이다.워낙 널리 알려진 시라 이 시를 둘러싼 이야기와 論評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본문 글자에 차이가 많은 것도 역으로 이 시가 널리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주석]
楓橋夜泊[풍교야박] 제목이 ‘夜泊楓江야박풍강’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楓橋풍교’는 강소성 吳縣 창문 밖의 서쪽 10리에 있다. 《豹隱紀談표은기담》에 “풍교는 옛 이름이 封橋봉교였다. 후에 장계 시의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구절을 따라 ‘풍교’로 고쳤다.[楓橋 舊名封橋 後因張繼詩江楓漁火句 改楓橋 풍교 구명봉교 후인장계시강풍어화구 개풍교]”라는 기록이 보인다.


張繼[장계] 생몰년 미상이다. 字는 懿孫의손으로 襄州(양주, 지금의 호북성 양양현) 사람이다. 일설에는 南陽(남양, 지금의 하남성 남양현) 사람이라고 한다. 천보 12년(753)에 진사에 급제, 강남에서 염철판관을 역임했다. 絶句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詩에 대해서는 陶今雁이 『唐詩三百首詳注』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張繼의 詩名은 일찍부터 알려졌으며 劉長卿, 顧況등과 交流하였다. 前人들이 그를 評하길 ‘詩情이 시원하고 맑으며, 쇠붙이나 돌 소리가 나는 듯 하다. 豊厚한 姿態는 맑고 멀어 道者의 氣風이 있다.’라고 하였다.″  《全唐詩》에 시 1卷이 전한다.


江楓漁火[강풍어화] ‘江楓’은 강가의 단풍나무를 말하는데 ‘江村’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淸나라 兪樾의 〈楓橋夜泊詩碑〉에 “당나라 張繼의 〈楓橋夜泊〉 시는 인구에 회자되는데, ‘江楓漁火’ 네 글자만은 자못 의심할 만하다. 宋나라 龔明之의 《中吳紀聞》에는 ‘江村漁火’라 하였으니, 송나라의 옛 서적을 보물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 이 시는 宋나라 王郇公(王珪)이 옮겨 적어 돌에 새긴 적이 있는데 지금은 볼 수 없다. 明나라 文待詔(文徵明)가 〈비에〉 써놓은 것도 흐릿해서 ‘江’자 아래 글자를 분별할 수 없다. 筱石中丞(陳夔龍)이 내게 글을 보충해달라고 부탁해 우선 옛 판본을 따랐지만 ‘江村’이라고 쓴 古本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따로 시 한 편을 지어 옆에 새겨넣어 보는 사람들에게 고한다. ‘郇公(王珪)의 옛 기록 오랫동안 알 수 없고, 待詔(文徵明)가 남긴 비문 더듬어볼 수 없구나. 다행히 《中吳紀聞》 남아 있으니, 千金 값의 한 글자가 江村이로구나.[郇公舊墨久無聞 待詔殘碑不可捫 幸有中吳紀聞在 千金一字是江村]’ ”라는 기록이 있다. ‘江楓’이란 말은 원래 굴원의 《楚辭》에 보이는 “맑고 맑은 강물, 강가엔 단풍나무 있네.[湛湛江水兮上有楓]”에서 왔다고 보기도 한다. ‘漁火’는 고기를 잡으려고 漁船에 켠 불빛을 말한다.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姑蘇’는 蘇州의 별칭이다. 도시 서남쪽에 姑蘇山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한산사(寒山寺)는 중국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시 서쪽는 십리 정도 떨어진 풍교고진(楓橋古鎭)에 있으며 작지 않은 사찰이다. 소주는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기와 쌀이 많은 지역으로 수나라 때 건설한 대운하가 있는데, 북경에서 산동, 절강성을 거쳐 항주까지 도달하는 경향대운하가 있다. 이곳 소주의 서남쪽 3.5km 지점의 풍교진(楓橋鎭)에 풍교와 한산사가 있다. 아치모양으로 된 풍교(楓橋)는 강촌교(강교)라고도 하는데, 단풍나무가 주위에 있다.한일반적으로 절은 산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산사는 수많은 물길 사이에 얌전히 앉아 있을 뿐이다. 한산사는 사지(寺誌)에 의하면 양(梁) 천감년간(502~519) 창건으로 묘리보명탑원(妙利普明塔院)이라 했으나, 당대(唐代)에 기인(奇人) 한산(寒山)승(僧)이 초암(草庵)을 세운 터에, 승(僧) 희천(希遷)이 절을 세우고 한산사라 칭했다 한다. 당의 시인 장계(張繼)가『楓橋夜泊』을 읊은 뒤 유명해졌다. 현재의 건축은 청말 민국 초에 중수한 것으로, 경내에는 주지 근주(近舟)가 그린 한산ㆍ습득상(像)의 석각, 청나라 말기의 저명한 학자 유월(兪越)의 필치로 쓴 『풍교야박시』의 비석 등이 있다.


○ 夜半鐘聲[야반종성] 歐陽脩가 지적한 이래 논란(아래 평설 참조)이 분분하다. 唐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라는 의견도 있다. ‘半夜鐘聲’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평설]
○ 시인들이 좋은 구절을 탐하듯 구하면서 이치가 통하지 않는 것도 語病이 된다. 당나라 시인의 시에,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구절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삼경(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같이 깊은 밤은 종 치는 때가 아니다.” 하였다.


○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은 당나라 張繼가 성 서쪽 風橋 가까운 절에 쓴 시이다. 歐陽文忠公(歐陽脩)이 야밤은 종 치는 때가 아니라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는 公이 吳 지방에 가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지금도 吳 지방의 山寺에서는 실제 야밤에 종을 친다. 張繼의 시 30여 편을 내 집에 가지고 있는데 왕왕 佳句가 많다.


○ 張繼의 ‘夜半鐘聲到客船’ 구절을 두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모두 옛사람들에게 우롱당하는 것이다. 시인은 경물을 빌려 말을 하니 聲律의 조화와 興象이 합치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자잘한 사실을 어느 겨를에 따지겠는가. ‘半夜’인지 아닌지는 물론이고 ‘鐘聲’이 들리는지도 알지 못하겠다.


○ 전편의 詩意는 ‘愁眠’에서 생기니 묘한 곳은 말로 하지 않는 데 있다.


○ 시름에 잠긴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문득 새벽 종소리를 탓한다. 시인의 오묘한 말이 왕왕 이와 같다.


○ 먼지 가득한 시끄러운 세상에 다만 종소리만 들리니 황량하고 적막함을 알 만하다.


○ ‘客船’은 張繼 자신을 말한다. 본래는 ‘야밤에 종소리가 들리는데 客船이 막 도착했고, 江楓漁火를 마주하며 수심에 잠 못 드니 이미 달 지고 까마귀 운다.’라고 써야 한다. 客情에 물 위에서 묵으니 悲感을 함축한 것이 모두 言外에 있다. 글의 순서를 도치시켜 쓴 것이지 따로 客船이 도착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夜半’과 윗구절의 ‘月落烏啼’는 어찌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지 않았는가.


○ ‘楓橋’는 吳郡 閶門 밖에 있어 寒山寺와 거리가 아주 가깝다. 첫 구는 배를 정박하고 난 때를 말하고, 다음 구는 나그네의 회포를 말한다. 뒤의 두 구는 밤이 깊어 비로소 배를 댄다고 하였으니 나그네의 밤 여행이 길었음을 알 수 있고, 절 가운데 아직 종소리가 있다 하였으니 山僧이 밤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자가 밤에 여행하며 일어난 일을 쓴 시에 불과하지만 손 가는 대로 묘사해 자연스런 趣味를 얻었다.


○ 시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당나라 사람들의 七言絶句는 뛰어난 작품이 숲을 이루었는데, 유독 이 시만이 일본에 전해져 부녀자와 아이들까지도 익히고 외울 정도이니, 시인이 전해지고 전해지지 않고는 또한 행과 불행이 있는 것인가.


○ 이 시는 楓橋에 배를 댄 하룻밤의 경치를 묘사한 것이다. 시 가운데 보고 듣는 것을 제외하고 겨우 ‘愁’자 하나에 心情을 투명하게 드러냈다. ‘夜半鐘聲’은 시름에 잠긴 나그네가 아니라면 꼭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後人들이 분분하게 야밤에 종소리가 있느니 없느니 따진 일은 참으로 可笑로운 줄 알겠다.






매관 매직 등 정치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한 당 조정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3번이나 낙방하고 귀향하는 길에 소주 풍교에서 야박하며 지은 이 시는  비관을 넘어 당시 현실에 대한 우회적인 비꼼이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