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산책]
黃鶴樓(황학루) 황학루에서 - 崔顥 (최호)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余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鄉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황학루( 최호 )
석인이승황학거 차지공여황학루
황학일거불복반 백운천재공유유
청천력력한양수 방초처처앵무주
일모향관하처시 연파강상사인수
釋] 옛사람이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나버려, 지금 이곳에는 단지 황학루만이 남겨져 있다. 황학은 한번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 천년 긴 세월을 단지 흰 구름만이 유유하게 떠다니고 있다. 맑은 날씨라 강물에는 한양 땅의 나무가 분명하게 비치고, 앵무주에는 향기로운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저물녘, 고향 쪽을 바라보고 싶지만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강에 자욱한 물안개는 사람을 근심에 잠기게 만든다.
[解題]이 시는 천고의 절창으로 알려진 최호의 율시이다. 또한 앞의 4구는 破律인데, 이로 인해 끊임없이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던 시로도 유명하다. 이 시의 主旨는 누각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볼 때 적막한 마음 한켠에서 이는 鄕愁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神話를 끌어다 옛일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고향을 생각하는 자신의 심회를 잘 풀어내었다. 때문에 沈德潛이 이 시를 두고 ‘천고의 奇才를 떨쳤다.[擅千古之奇]’고 일컬은 것이다
[주석]
○ 黃鶴[황학] ≪全唐詩≫에는 본래 ‘白雲’으로 되어 있다.
○ 黃鶴樓[황학루] 지금의 胡北省 武昌縣 서쪽 黃鶴磯에 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강의 수평선이 천리에 이른다고 한다. ‘황학루’라는 명칭을 두고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삼국시대 蜀의 費文褘가 이곳에서 황학을 타고 仙境에 올랐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과 仙人인 王子安이 황학을 타고 지나다 이곳을 경유하였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 悠悠[유유] 먼 곳에서 바람이 이는 가운데 떠다니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 歷歷[역력] 분명한 모습이다.
○ 漢陽[한양] 武昌의 서북쪽에 있으며, 황학루와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인다.
○ 萋萋[처처]: 많고 무성한 모양이다.
○ 鸚鵡洲[앵무주] 황학루의 동북쪽 長江 가운데에 있었던 섬이다.
○ 鄕關[향관] 시인의 고향을 말한다.
○ 唐人七言律詩 當以最顥黃鶴樓爲第一 - 宋 嚴羽, ≪滄浪詩話≫
당나라 시인의 칠언율시 가운데, 최호의 〈황학루〉 시를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 宋 엄우, ≪창랑시화≫
○ 此詩首二句先對 頷聯却不對 然破題已先對 如梅花偸春而先開 謂之偸春格 - 明 梁橋, ≪冰川詩式≫
이 시는 첫 두 구에서 먼저 대를 이루었고, 함련에서는 오히려 대를 이루지 않았다. 그러나 破題(注)에서 이미 먼저 대를 이룬 것이 마치 매화가 봄을 훔쳐 먼저 피어난 것과 같다 하여 이를 일러 ‘봄을 훔친 격[偸春格]’이라 한다. - 明 량교, ≪빙천시식≫
[注] 破題[파제] 시의 첫머리에서 그 글제의 뜻을 설파하는 것을 이른다
○ 此詩向推絶唱 而未言其故 讀者欲索其佳處而無從 評此詩者 謂其意得象先 神行語外 崔詩誠足當之 然讀者仍未喩其妙也 余謂其佳處有二 七律能一氣旋轉者 五律已難 七律尤難 大曆以後 能手無多 崔詩飄然不群 若仙人行空 趾不履地 足以抗衡李杜 其佳處在格高而意超也 黃鶴樓與岳陽樓 幷踞江湖之勝 杜小陵 孟襄陽登岳陽樓詩 皆就江湖壯闊發揮 黃鶴樓當江漢之交 水天浩蕩 登臨者每易從此着想 設崔亦專詠江景 未必能出杜孟範圍 而崔獨從黃鶴樓三字着想 首二句點明題字 言鶴去樓空 乍觀之 若平直鋪敍 其意若謂仙人跨鶴 事屬虛無 不欲質言之 故三句緊接黃鶴已去 本無重來之望 猶長恨歌言入地昇天 茫茫不見也 樓以仙得名 仙去樓空 餘者惟天際白雲 悠悠千載耳 謂其望雲思仙固可 謂其因仙不可知 而對此蒼茫 百端交集 尤覺有無窮之感 不儘切定黃鶴樓三字着筆 其佳處在托想之空靈 寄情之高遠也 通篇以虛處旣已說盡 五六句自當實寫樓中所見 而以戀闕懷鄕之意 總結全篇 猶岳陽樓二詩 前半首皆實寫 故後半首皆虛寫 虛實相生 五七言同此律法也 與此詩格調相同者 沈佺期龍池篇云 龍池躍龍龍已飛 龍德先天天不違 池開天漢分黃道 龍向天門入紫微 邸第樓臺多氣色 君王鳧雁有光輝 爲報寰中百川水 來朝此地莫東歸 李白鸚鵡洲云 鸚鵡來過吳江上 江水洲傳鸚鵡名 鸚鵡西飛隴山去 芳洲之樹何靑靑 烟開蘭葉香風暖 岸夾桃花錦浪生 遷客此時徒極目 長洲孤月向誰明 沈詩前四句專詠龍池 李詩前四句專詠鸚鵡 皆一氣直書 皆於後四句寫詩意 與崔詩同調也 後人登黃鶴樓者 因崔顥而不敢題詩 乾隆時黃仲則 自負淸才 有句云 坐來雲我空悠悠 爲時傳誦 亦好在托想空靈 就崔之白雲悠悠句 可以我字 遂用故入化 然不能越崔之詩境外也 - 現代 兪陛雲 ≪詩境淺說≫
이 시는 이전부터 절창으로 추앙받는데, 그 까닭을 말하기 전에는 독자들이 長處를 찾고자 해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시를 비평하는 이들은 그 뜻이 형상보다 먼저 얻어지고, 傳神하는 것이 말 밖에서 이루어졌다고들 하는데, 최호의 시는 참으로 그에 해당할 만하다. 하지만 독자는 여전히 그 묘함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長處를 두 가지로 보는 바이다.칠언율시는 능히 하나의 기운(기세)으로 감싸는데, 오언율시에서는 〈그것이〉 이미 어렵고 칠언율시는 더욱더 어렵다. 大曆 年間 이후, 이에 능숙한 이들이 많지 않았는데, 최호의 시는 빼어나면서도 독보적이어서 마치 신선이 허공을 다녀 그 발이 땅을 밟지 않는 것과 같으니, 족히 李白·杜甫와 필적할 만하다. 그 장처는 격조가 높고 뜻이 超邁한 것에 있다.황학루와 악양루는 강호의 명승지를 나란히 점하고 있다. 杜小陵(杜甫)과 孟襄陽(맹호연)의 〈登岳陽樓〉 시는 모두 강호의 웅장하고 광활한 기세를 발휘한 것들이다. 황학루는 長江과 漢水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고 물과 하늘이 드넓어, 누각에 오르는 이들이 매양 이곳에서부터 시상을 떠올리기 쉽다. 만일 최호 역시 강가의 풍경만을 오로지 읊었다면, 아마도 杜甫나 맹호연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호는 유독 ‘황학루’ 세 글자에서 착상을 하며, 제1·2구에서 제목의 글자를 짚어내어 황학은 떠나고 빈 누각만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언뜻 보면 마치 평담하게 直敍한 것 같지만 그 뜻은 마치 신선이 학을 타는 것과 같아, 그 일은 허무함에 속하되 직언하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3구에서 바로 이어서 황학이 이미 가버리고 난 후 다시 돌아올 가망이 없다고 했으니, 마치 〈長恨歌〉에서 ‘入地昇天’이라 했던 것처럼 아득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각은 신선 때문에 이름을 얻었으나, 신선은 가고 없어 누대가 비었으니 남아 있는 것이라곤 하늘 끝의 흰 구름이어서 천년 동안 유유히 흘러갈 뿐이다.구름을 바라보며 신선을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진실로 옳지만 신선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알 수가 없게 된다. 구름을 대하고 아득하게 여러 생각들이 일어나며 더욱 끝없는 감개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적절히 황학루 세 글자에 착안하여 시를 썼을 뿐 아니라, 그 훌륭한 점은 상상에 의탁한 것의 空靈함과 정을 부친 것의 高遠함에 있다.시 전편은 ‘虛處’로써 이미 말을 다하였지만, 5·6구에서는 누각에서 본 것과, 임금을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실제로 그려냄으로써 전편을 총결하였다. 〈악양루〉 시 두 편이 전반부에서는 모두 實寫를 하였고 후반부에서는 모두 虛寫를 하였으니 虛와 實이 相生한 것이다. 오언과 칠언에서 이러한 율법을 동일하게 사용하였다.이 시와 격조가 동일한 것으로는 沈佺期의 〈龍池篇〉에 있는데, 이 시에 이르기를 “龍池躍龍龍已飛 龍德先天天不違 池開天漢分黃道 龍向天門入紫微 邸第樓臺多氣色 君王鳧雁有光輝 爲報寰中百川水 來朝此地莫東歸”라 하였다. 또 李白의 〈鸚鵡洲〉가 있는데, 이 시에 이르기를 “鸚鵡來過吳江上 江水洲傳鸚鵡名 鸚鵡西飛隴山去 芳洲之樹何靑靑 烟開蘭葉香風暖 岸夾桃花錦浪生 遷客此時徒極目 長洲孤月向誰明”이라 하였다. 심전기의 시는 앞의 4구에서 오로지 龍池만을 읊고, 李白의 시는 앞의 4구에서 오로지 鸚鵡만을 읊어, 모두 하나의 기운으로 直書하였다. 또한 모두 뒤의 4구에서 詩意를 썼으니 최호의 시와 그 격조가 같다. 후대 사람들 가운데 황학루에 오른 이들은 최호 때문에 감히 시를 짓지 못하였다. 건륭 연간에 黃仲則이 빼어난 재주를 자부하며 ‘坐來雲我空悠悠’라는 싯구를 지었는데 그 당시 傳誦되었다. 이 또한 그 장처가 공령한 가운데 뜻을 기탁한 데 있으니 이는 곧 최호의 ‘白雲千載空悠悠’ 구에 ‘我’자를 더하여 결국 옛 것을 차용하고 변화시키는 데에 이르기는 하였으나 최호의 詩境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 現代 유폐운 ≪시경천설≫
황학루의 전설
황학루는 명성만큼 재미난 전설이 전해온다 . 극은록(極恩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서, 옛날 황학루 터에는 신씨라는 여인이 이곳에 주점을 열었다. 어느 날 한 도사가 그녀의 주점을 찾아 술울 청하는데 신씨는 그의 범상한 모습을 보고서는 그에게 외상술을 주었다. 주인은 공짜 술을 즐기는 도사를 싫어하는 기색 없이 올 때마다 환대했다. 반년동안 외상술을 마시던 그는 외상을 갚을 수 없자 은덕을 갚는다며 귤껍질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주막 벽에 황학 한 마리를 그려 줬다. 그리고 도사는 "손님이 와서 술을 마시고 놀 때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시오. 황학이 나와서 춤을 추며 주흥을 돋울 거요."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손님들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 주인도 같이 노래하고 그림속의 학도 춤을 추었다 소문이 전해지면서 주막집은 인산인해가 되어 신씨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도사가 다시 찾아와 품속에서 피리를 꺼내 불자 벽속의 학이 날아오자 이 학을 타고 날라 가버렸다 . 이후 고마움에 이곳에 누각을 짓고 '황학루'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황확루는 장시 성 난창의 등왕각(滕王阁), 후난 성 웨양의 악양루(岳阳楼)와 함께 ‘강남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원래는 233년 삼국 시대에 오나라 왕 손권(孙权)이 촉나라 유비(刘备)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세운 망루였다. 지금도 황학루 가장 높은 곳에는 당시 손권의 강한 의지가 남아 있다. ‘촉천극목(楚天极目)’이라 적힌 편액이 그것인데, 초나라의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의미다. 처음에는 3층 28m 높이로 세워졌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쟁과 화재에 7차례나 소실되고 중건되기를 반복하면서, 군사들이 망을 보던 장소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하는 누각으로 180°변화하였다.
당대(唐代)와 송대(宋代)에는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찾아와 황학루를 예찬하는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최호(崔颢)가 쓴 시 <황학루>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백도 그의 작품을 보고 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며 붓을 내려놓았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황학루 초입에서 만나는 각필정(搁笔亭)이 이백이 붓을 내려 았다는 장소다.
지금의 황학루는 1884년 청나라 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85년에 재건한 것이다. 높이가 55.47m로 겉에서 보면 5층이지만 내부는 9층으로 이뤄져 있다. 애석하게도 목조 건축물을 철근과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예스런 멋은 사라졌다.
뛰어난 절경과 흥미로운 전설을 간직한 명소답게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시인과 명인이 황학루를 찾았다.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와 문장을 남겼다. 현재까지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만 400여 편에 달한다. 이 중 8세기 당대 관료 최호(崔顥)가 쓴 〈황학루〉는 중국 시문학의 한 획을 그은 절창으로 손꼽힌다. 이 시는 중국 칠언율시(七言律詩)의 대표작으로, 지금도 중국인들 사이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황학루〉최호
옛사람 이미 황학 타고 가버려
이곳엔
속절없이 황학루만 남았구나
황학은
한번 떠나 다시 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년토록 공연히 떠다니네.
한양 땅 나무는
맑은 내에 뚜렷하고
앵무주에
방초는 무성하구나.
날 저무니,
고향은 어디에 있는고?
물안개 핀 강가에서
수심에 잠기네.
최호는 40여 편의 시를 남겼지만,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라 평가할 수 없다. 10대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할 만큼 총명했으나 술을 즐겨 마셨고 도박을 좋아했다. 젊었을 때는 민간에서 떠도는 가사를 시구에다 차용하길 즐겼다. 이 때문에 초창기 시는 문장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은 부실했다. 그러나 관직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홀연 자리를 박차고 나와 천하를 20년간 주유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중년에는 웅장하고 거침없는 풍격으로 시를 써 내려갔다. 〈황학루〉는 그 절정기에 쓴 시이다.
칠언율시는 7자로 해서 8구로 된 한시 형식이다. 3~6세기 중국 강남의 육조부터 격률이 엄격하고 규칙이 엄정한 율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대 초기에는 오언율시가 먼저 성행했으나, 칠언율시가 곧 대세를 이뤘다. 보통 3~4구와 5~6구가 대구(對句)되는데, 〈황학루〉는 그 구조를 완벽히 보여준다. 훗날 남송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엄우(嚴羽)는 “당대 칠언율시 가운데 최호가 지은 〈황학루〉가 제일이다(唐人七言律詩當以崔顥黃鶴樓爲第一)”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최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백도 뒤늦게 황학루를 찾았다. 황학루 주변을 둘러싼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어 시상이 자유롭게 떠올랐다. 하지만 누대에서 최호가 남긴 시를 발견했다. 시를 읽은 이백은 “참으로 절묘하구나”라고 탄식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이 이야기에 감복한 후세인들은 황학루 동쪽에 정자 ‘각필정(擱筆亭)’을 세웠다. 각필은 붓을 놓았다는 뜻이다. 훗날 이백은 〈황학루에서 광릉(오늘날의 양저우·揚州)으로 가는 맹호연을 떠나보내다(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를 남겨 아쉬움을 달랬다.
오랜 벗이 서쪽의 황학루를 떠나(故人西辭黃鶴樓)
봄 안개 지는 춘삼월 광릉으로 내려가네(煙花三月下揚州).
외로운 돛단배 멀리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孤帆遠影碧空盡)
오직 하늘 끝으로 양쯔강만 흐르는구나(惟見長江天際流).
여기서 등장하는 맹호연은 후베이성 샹양(襄陽) 출신의 시인이다. 맹호연은 몇 차례 과거에 도전했으나 관계에 ‘관시(關係)’가 없어 줄곧 낙방했다. 40세가 넘어 문인들의 추천으로 현종(玄宗)을 배알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읊었던 시에서 ‘재주가 없어 영명한 군주에게 버림받았다(不才明主棄)’는 글귀가 문제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그 뒤 남은 생을 고향에 은둔하며 살았다. 훗날 왕유(王維)와 더불어 중국 산수전원시(山水田園詩)의 쌍벽으로 손꼽혔다. 이백이 다시 붓을 들어 황학루에 관한 시를 남긴 것은 불우한 삶을 살았던 맹호연을 위한 헌사였다
' **(1) 한시이론교실 > ☞ 한시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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