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蜀先主廟(촉선주묘) -촉나라 선왕의 사당, 유우석(劉禹錫;772-842)

착한 인생 2018. 12. 19. 21:10



[한시산책]

蜀先主廟(촉선주묘) -촉나라 선왕의 사당

유우석(劉禹錫;772-842)

 

  

 


天地英雄氣(천지영웅기)
千秋尙凜然(천추상늠연)
勢分三足鼎(세분삼족정)
業復五銖錢(업복오수전)
得相能開國(득상능개국)
生兒不象賢(생아부상현)
淒涼蜀故伎(처량촉고기)

來舞魏宮前(내무위궁전)

 

 

천지에 가득한

영웅의 기세

천추에 오래토록

그 기상은 여전히 늠름하구나

 

 

천하의 형세는

촉오위 세나라로 삼분되었고

공업은

오수전(五銖錢)을 회복시켰네

 

 

재상 얻어

능히 나라를 열었으나

아들은

유비와 달리 현명하지 못하였다

 

 

~ 처량하구나!

촉나라 옛 기녀와 악대들이여

오늘은

위나라 궁전 앞에서 춤을 추다니

 

  

 

 

유명한 三國志속의 한 축을 장식했던 촉나라 유비를 노래한 이다.

 

촉나라 선주 유비의 영웅적 기개는 천지를 덮을 만하고,

천추에 길이 남을 영웅적 기개는

여전히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숙연히 경모(敬慕)하게 만든다.

 

서촉(西蜀)을 근거로 하여 천하를 三分하는 형세를 이루었고,

광무제가 오수전을 회복시켰듯이

유비 역시 한나라의 대업을 부흥시켰다.

 

사람을 잘 알아보는 혜안(慧眼)으로

제갈량을 재상으로 삼아 開國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아들인 후주 유선은 아버지처럼 현능한 인물이 못 되었다.

 

~~ 처랭하구나!

이제는 멸망한 촉나라 옛 예인(藝人)들이

위나라의 궁정 앞에 와서 춤을 추고 있다니!

 

 

 

[주석]

 

劉禹錫[유우석, 772~842]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자는 몽득(夢得).< # 별첨 참조>

 

蜀先主廟[촉선주묘] 先主廟(선주묘)夔州(기주), 즉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에 있다. 先主의 개국군주인 劉備를 말한다. 그가 촉 땅을 근거지로 하여 칭제(稱帝)하였으므로 세칭(世稱) ‘先主(선제)’라 하는 것이다.

 

英雄[영웅] 三國志≫ 〈蜀志 先主傳(촉지 선주전)조조가 선주에게 말하기를 대저 영웅이란 흉중(胸中)에 원대한 뜻을 품고 복중(腹中)에 좋은 계책이 있으며, 우주를 감싸안을 만한 기틀과 천지를 삼킬 만한 뜻을 지닌 자이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그대 유비와 나 조조뿐이다.’[夫英雄者 胸懷大志 腹有良謀 有包藏宇宙之機 呑吐天地之志者也 今天下英雄 唯使君與操耳 부영웅자 흉회대지 복유량모 유포장우주지기 탄토천지지지자야 금천하영웅 유사군여조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조조가 유비를 상찬하며 영웅이라 칭한 것이다.

 

凜然[늠연] 사람으로 하여금 숙연하게 존경심을 일으키게 할 만한 모습.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말한다.

 

三足鼎[삼족정]: , , 의 삼국의 정세를 세발솥[]이 서 있는 모습에 비유한 것이다.

 

業復[업복] 漢代大業을 회복시킨다는 뜻이다.

 

五銖錢[오수전] ‘오주전으로 읽기도 한다. () 무제(武帝) 때 발행된 화폐이다. 무게는 五銖, (1냥의 24분의 1)는 무게의 단위로 241이 된다. ‘五銖라는 두 篆字를 새겨 넣었다. 왕망(王莽)이 이를 폐지했는데, 변방에서만 사용되었다가 광무제의 중흥기에 이르러 다시 회복되었다. 후한 말에 동탁에 의해 다시 폐지하였는데 유비가 촉한을 세우면서 다시 부활시켰다. 여기서는 광무제가 오수전을 회복시킨 일을 들어 유비가 漢代의 대업을 부흥시킴을 비유하였다.

 

得相[득상] 유비가 제갈량(諸葛亮)을 재상으로 삼아 촉한(蜀漢)을 보좌하게 만든 것을 의미한다.

 

生兒[생아] 유비의 아들인 후주(後主) 유선(劉禪)이다. 유선은 어리석어 인재등용이나 정치능력이 없어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禹君으로 평하였다.

 

不象賢[부상현] 象賢은 현명한 사람이 나라를 본받는 것을 말한다. 후주(後主)인 유선이 부친만큼 현능(賢能)하지 못하였음을 말한다.

 

蜀故伎[촉고기] 이미 멸망한 촉국의 옛 예인(藝人)이다. ‘와 같으니, 女樂이다. 나라가 나라를 멸하고 촉의 기녀와 악대를 위나라로 끌고 왔다. 뒤에 太尉 司馬昭가 항복해 끌려온 後周 劉禪 앞에서 의 기녀들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였다.

 

魏宮[위궁] 위국(魏國)의 궁정(宮庭)이다. 三國志≫ 〈蜀書 後主傳(촉서 후주전)33의 배송지(裴松之)의 주()에 인용한 진()나라 습착치(習鑿齒)漢晉春秋(한진춘추)사마문왕(司馬昭)이 유선에게 연회를 베풀어주고는 예전의 촉나라 기녀들로 하여금 춤추게 하니,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비통해하였는데, 유선만은 즐거워하며 태연자약하였다.[司馬文王 與禪宴 爲之作故蜀伎 旁人皆爲之感愴 而禪喜笑自若 사마문왕 여선연 위지작고촉기 방인개위지감창 이선희소자약]”라 하였다.

 

   

 

# 유우석(劉禹錫(Liu Yuhsi 772 ~ 842)

 

자는 夢得, 彭城(지금의 江蘇省 洞山縣)사람이다. 貞元 921세에 進士에 합격하고, 오래지 않아 795博學宏辭科(박학굉사과)에 올라 太子校書가 되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監察御史拜任되었다. 유종원, 왕숙문과 친하엿고, 王叔文의 추천에 힘입어 禁中에 들어가 몇 년 동안 政治를 맡았을 때 新政을 펼치기도 하였다. 나중에 왕숙문이 실각하자 유우석 또한 郞州(지금의 湖南 常德縣)司馬로 귀양갔는데, 이 때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낭주에서 10녀을 살면서 民歌를 이용하여 新詞로 개작하였는데, 그 때문에 武陵一帶夷歌가 거의 그의 潤色을 거쳤다. 元和 10년에 부름을 받아 京都로 돌아왔다. 그러나 <玄都觀詠看花君子詩> 때문에 執政者를 거스리게 되어, 또 좌천을 당하여 連州(지금의 廣東省 連縣)刺史에 임명되었다. 이후에 蘷州(기주和州 刺史를 역임하였다. 太和 2년에 배도(裵度)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태자빈객 겸 검교예부상서에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世人들은 그를 劉賓客또는 劉尙書이라 불렀다. 죽었을 때 나이는 71세였다. 사후에 호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유우석은 위응물 ·백거이 등과 더불어 三傑이라 불리었으며, 유종원과는 유유’, 백거이와는 유백이라는 호칭이 뒤따라 다녔다. 유우석의 詩歌雄渾하고 爽朗하였으며, 절주 또한 비교적 화해하고 음향이 밝다. 당시에 詩豪라는 이 있었다. 그의 小詩들은 글 뜻이 매우 깊고, 民歌의 활발성을 지녔다. 그의 뛰어난 곳은 곧 民歌의 양분을 흡수한 것이니, 그의 著名<竹枝詞> <楊柳枝詞>가 대표가 될 수 있다. 말년에 白居易와 교유가 매우 밀접하였는데, 백거이가 그의 <石頭城>시를 지나치도록 칭찬하고, ‘潮打空城寂寞回를 말하여 신비스럽고 超脫하게 그렸다.”고 하였다. 그의 에 있어서의 성취는, 白居易 · 元稹과 같이 로 하여금 音樂과 융화가 되게 하여, 문자와 음악의 결합이 詩歌로 하여금 더욱 용이하게 민간에 流傳되도록 함에 있었다. ·舊唐書에 그의 을 넣어 두었다. 著書劉夢得文集三十卷이 있다.


玄都觀詠看花君子詩 (현도관영간화군자시),

 

百畝筵中半是苔 (백무연중반시태)넓디 넓은 연회자리에는 이끼만 자욱한데

桃花淨盡菜花開 (도화정진채화개)복숭아꽃 다 없어지고 나물들만 무성하구나.

種桃道士歸何處 (종도도사귀하처)복숭아 심던 도사들은 다 어디로 갔나

前度劉郞今又來 (전도유랑금우래)지난날의 유랑만이 오늘 또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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