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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樽愛月(개준애월) 술잔 들어 달을 사랑하다.- 손순효(조선시대)

착한 인생 2018. 12. 19. 21:13


[한시산책]

개준애월(開樽愛月)- 손순효 

  

   

 

 

 

 

조선 정조 때 편찬된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를 보면, 조선 성종 때 문장이 고명하고 성리학에 밝아 불차발탁(不次拔擢·순서를 따지지 않고 특별히 채용)된 손순효(孫舜孝·1427~1497)라는 남산골 선비가 있었다. 국왕이 그를 총애했으나 그의 약점은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것이었다. 늘 얼굴을 벌겋게 해서 다니는 모양새가 딱해 성종은 손순효에게 석 잔 넘게 마시지 말라는 계주령(戒酒令)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손순효가 입시하고 있는데 성종이 불러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지으라고 했다. 그런데 손순효를 보니 이미 몹시 술에 취해 있었다. 성종은 노기를 띠며 나의 경계를 잊어버리고 대취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흐린 정신으로 막중한 국서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 경은 물러가고 다른 신하를 불러 오너라고 했다. 손순효는 황공해서 부복한 채로 오늘 신의 출가한 딸이 들러서 뭇사람의 권함을 이기지 못하고 주는 대로 받아먹었사오나 글을 짓는 데는 과히 지장이 없을 듯 하니 다른 사람을 부르실 것 없이 신에게 하명하옵소서라고 아뢰었다.

 

나의 속이 협착하면 두드려 넓게 해다오

취중에 과연 어떻게 하나 보려고 성종이 붓과 벼루를 내주니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문장을 풀어놓았다. 성종이 그것을 받아보니 한 자, 한 구가 틀리지 않았다. 성종은 다소 괘씸했으나 그 취기에도 놀랄 만한 정신력을 지녔음을 보고 크게 칭찬하며 너는 취한 정신이 한층 맑구나하고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해롭다 했다. 그리고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면서 은잔 한 개를 하사했다.

그런데 손순효가 은잔을 보니 형편없이 조그만 잔이라, 그 잔으로는 아무리 독주를 마시더라도 양에 찰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생각다 못해 은장(銀匠)이를 불러 왕명을 어기지 않고 한 잔으로 술을 많이 마실 궁리로 잔의 두께를 얇게 늘려서 큰 잔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 잔으로 일부러 독한 술을 한 잔씩만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국왕이 불러 입시했는데 손순효가 얼굴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성종은 노기를 띠며 내가 일부러 작은 잔까지 주었는데 어찌 된 연유로 이렇듯 많이 취했는고. 한 잔씩만 마시지 않고 여러 잔을 마셨나 보구나.”라고 했다. 손순효는 국궁(鞠躬·존경하는 뜻으로 몸을 굽힘) 재배하면서 신이 어찌 터럭 끝만큼이라도 기망할 리가 있사오리까. ”라고 대답했다. 서슴없는 대답에 성종도 그가 속일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그 술잔을 가져오라했다.

그런데 성종 앞에 나타난 술잔은 주발만 한 것이었다. 성종은 크게 의심쩍어서 이게 어디 내가 준 술잔이냐고 했는데, 손순효는 또 한 번 부복하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상감마마께옵서 주신 술잔이 너무 작기에 은장이를 시켜 늘리기만 했을 뿐 은의 무게는 조금도 보태지 않았사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호방하고 뇌락(磊落)한 군주 성종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걷잡을 수 없어 크게 웃고는 앞으로 내 속이 협착한 데가 있으면 그처럼 두드려 넓게 해다오라며 다시는 술과 관련한 일로 손순효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늘 안주가 부족한 손순효의 집에 가끔 내시를 시켜 음식을 내려보냈다.최근 사회 지도층의 분별없는 술자리는 수기치인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한다.

 

그 후 손순효가 외직으로 부임돼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였다. 매일처럼 대하던 성종이 보고 싶었던 그는 관찰사로 가 있은 지 여러 달 만에 밤에 한양에 올라와 성종을 만나고 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대간들이 들고일어났다. ‘도백이 자리를 함부로 비우고 마음대로 도성에 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간관들의 요지였다. 성종도 감사가 순력(巡歷) 중인 임지를 함부로 떠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을 낮처럼 알고 떠나와서 잠깐 보고 간 인정 있는 신하를 어찌 율()로써 벌줄 수 있으리오. 대간들의 글에 대한 성종의 비답(批答)은 이러했다.

아들이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이 군신 간의 정리다. 아침, 저녁으로 만나던 나를 보고 싶어 밤을 낮 삼아 왔다 간 그가 무슨 죄가 있느냐. 너희도 멀리 떠나 있으면 어버이도 임금도 보고 싶지 않겠는가.”

무슨 말이든지 트집을 잘 잡는 대간들도 정이 넘치는 성종의 말에는 유구무언이었다.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된 어느 해 봄, 궐내에서 잔치를 베풀고 군신이 서로 화락한 하루를 보냈다. 그때 술이 반쯤 취한 손순효는 임금의 곁으로 다가와 용상을 어루만지며 이 자리가 아깝사옵니다.”라고 했다. 그것은 연산군이 군왕의 자질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 사실을 목격한 신하들은 또 들고일어나 손순효는 신하의 몸으로서 용상 가까이 갔을 뿐 아니라 용상을 어루만지고 무엄히 법도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였사오니 엄하게 율로 다스려주소서라며 입계(入啓·임금에게 상주하는 글을 올리는 것)했다. 이에 성종은 내가 신하들의 충간도 듣지 않고 여색에 탐한다는 말을 남이 듣는 데서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가까이 와서 간했는데 그것이 무슨 죄냐라며 되레 손순효를 두둔했다. 그 후 손순효는 청백리로 대사헌, 좌찬성, 판중추부사를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반취반성의 주도(酒道) 죽을 땐 비석 대신 소주 한 병 

그의 행장을 보면 유언에서 내 죽거들랑 비석을 세울 생각은 말고 내가 평생 좋아하던 소주 한 병만 곁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개준애월(開樽愛月)- 손순효

동산에 달 두둥실 돋아 단상 위를 비추니(月白東巒便炤堂)
술 단지에 가득 달빛이 잠겼구나(一樽涵得幾多光)
어여뻐라 작은 잔에 발하는 맑은 빛은(只憐些孑淸輝發)
나로 하여금 함부로 잔을 못 들게 하노라(不許庸人取次嘗).